[DBR]美 해군은 잡스같은 내부 제안 왜 묵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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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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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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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전후 미 해군 전함에서 하는 사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정확했다. 평균적으로 9500발을 쏘면 겨우 121발만이 표적에 맞았다고 한다. 그즈음 미 해군의 윌리엄 심스 중위는 소총을 지지대에 받치고 망원경을 장착한 상태에서 연속조준사격을 하면 명중률이 30배나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워싱턴의 해군본부에 보냈다. 결과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심스는 포기하지 않고 보고서를 동료 장교들과 사령관들에게 두루 보냈다.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해서 백악관에 보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는 해군 차관보를 지냈고 ‘1812년의 해전’이라는 책까지 저술한 전문가였다. 정치인의 시각에서 해군본부의 문제점을 숱하게 느꼈던 루스벨트는 심스를 연속조준사격 장치 개발과 명중률 개선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약 6년간 그 자리에서 일한 심스는 이후에 미 해군으로부터 ‘어떻게 쏘는지 가르쳐준 사람(the man who taught us how to shoot)’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가 개발한 연속조준사격 장치는 미 해군 병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으로 기록됐다.

○ 혁신의 덫, 관료주의

왜 해군본부는 처음에 심스 중위의 제안을 묵살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까. 혁신과 발전을 저해하는 개인적, 조직적 문제점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심스는 본부에서 7500km나 떨어진 남중국해의 함상에서 일하는 하급 장교였다. 해군 병기의 개선을 책임지는 곳은 본부의 병참국이었으며, 충성심과 복종은 해군의 중요한 덕목이자 위대한 전통이었다. 해군본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해군의 전투력을 결정하는 것은 함장들의 항해 기술과 지휘 능력이었다. 함장들이야말로 해군의 핵심이자 본질이었고, 이를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기술적인 변화와 혁신은 해군의 핵심과 본질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만 수용됐다. 병사들의 사격 능력은 훈련으로만 끌어올릴 수 있는데 쓸데없이 이상한 장치를 만들어 주면 병사들이 훈련을 게을리하고, 함장들의 능력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도 없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어느 집단에나 관료주의나 위계질서는 있다. 특히 자부심이 강하고 정체성(identity)이 제대로 확립된 집단일수록 빠른 보고체계와 상명하복이 중시된다. 상대적으로 전통과 기강이 확립돼 있지 않은 조직과 비교하면 이런 특징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다. 그런 특징들이 제대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고 변화하는 환경 앞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나쁜 것이다.

심스는 미 해군의 고위 장성들이 대통령의 권위에 편승한 초급 장교의 발명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장치를 무조건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대신 함정들 간 사격대회를 열어 함장들 스스로가 이 기술을 찾아 쓰도록 유도했다. 그의 장치를 사용한 함정들이 기존 방법을 고수한 함정들에 비해 훨씬 나은 결과를 내자 미 해군 내에 자연스럽게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그가 개발한 장치는 함장들의 지휘 능력을 훼손하지 않았고 충성심이 흐려지도록 하지도 않았다. 만약 심스가 자신이 개발한 장치를 무조건 사용하도록 강제했다면 아마 해군본부와 함장들의 저항이 훨씬 심했을 것이다. 소총만으로 사격한 결과가 그의 장치를 사용할 때보다 더 잘 나오도록 온갖 강압과 공모와 조작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혁신적 기술이 보급되기까지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 정체성과 혁신

원래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정체성은 한 개인이 타인과는 구별되는 어떤 고유한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다룰 때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집단이나 조직에서 정체성은 사명이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해주는 긍정적 형태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요하지 않은 외형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정체성은 빠른 변화와 혁신이 요구될 때 저항하는 힘이나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변화와 혁신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결과를 튼튼하게 만들며,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은 외형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옳은 방향으로 정체성이 발현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는 사람이라면 심스 중위처럼 조직의 정체성을 잘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 이 기사의 전문은 DBR(동아비즈니스 리뷰) 112호에 실려 있습니다.

정현천 SK에너지 상무  
정리=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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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세대 지갑을 열게 하라

▼ 스페셜 리포트


‘초고령 사회’ 진입이 초읽기에 접어들었다. 고령인구의 비중이 늘면 국가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과정에 기회가 숨어 있다. 고령층, 즉 ‘시니어’는 마땅한 경제활동 없이 젊은 세대에게 의존하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왕성한 소비 계층이 될 것이다. 청년실업과 경기침체, 가계부채 심화로 청장년 세대의 구매력은 예전같지 않지만 은퇴 연령에 접어들기 시작한 베이비붐 세대는 돈을 쓸 의지와 능력이 모두 있다. 한국 시니어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고 이들을 공략하기 위한 ‘가족 마케팅’ ‘유니버설 디자인’ 등의 마케팅과 디자인 방법론을 전한다.



의견충돌이 혁신의 기회가 된다

▼ MIT슬론 매니지먼트


‘지속가능한(sustainable) 경영’은 업계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속가능성과 연관된 환경정책 및 사회정책을 도입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들 사이에는 지난 18년 동안 평균 4.8%의 주가수익률 차이가 났다. 단기적 이익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기업 스스로에도 좋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18개의 지속가능기업과 10개의 일반기업을 심층 조사해본 결과 이 두 그룹 사이에는 몇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었다. 지속가능기업의 경영자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했다. 또 협력업체와 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자기 회사의 경영정보를 보다 투명하게 공개했다. 무엇보다도 지속가능기업은 직원들 간의 의견 충돌을 억압하기보다 장려한다. 이런 대화가 시너지 효과 및 혁신으로 이어졌다.
#혁신가#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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