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장이 불법시위대에 맞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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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밤 FTA 집회 중단 요청하러 간 종로서장 봉변
머리-뺨 맞고 계급장 뜯기고… 10분간 집단폭행당해

모자-안경까지 벗겨진 채… 박건찬 서울 종로경찰서장이 26일 밤 반(反)한미 FTA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했다. 야당 의원을 만나러 가는 박 서장을 시위대가 둘러싸고 있다(위). 흥분한 시위대가 박 서장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폭행하는 모습(가운데). 모자와 안경이 벗겨진 채 간신히 빠져나온 박 서장이 세종로파출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아래).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서울지방경찰청 제공
모자-안경까지 벗겨진 채… 박건찬 서울 종로경찰서장이 26일 밤 반(反)한미 FTA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했다. 야당 의원을 만나러 가는 박 서장을 시위대가 둘러싸고 있다(위). 흥분한 시위대가 박 서장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폭행하는 모습(가운데). 모자와 안경이 벗겨진 채 간신히 빠져나온 박 서장이 세종로파출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아래).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서울지방경찰청 제공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무효화 요구 집회에서 시위대에 불법 집회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던 박건찬 서울 종로경찰서장(46)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날 집회는 형식상 사전 신고가 필요 없는 정당연설회였지만 연설회가 끝난 뒤 불법집회로 변질돼 시위대가 광화문 일대를 두 시간가량 점거하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려던 경찰관 2명이 골절상을 입는 등 경찰관 35명이 부상했다.

○ 종로서장, 시위대에 맞아 응급실행


집회를 주최한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야 5당 대표, 시민사회단체 등 2200여 명(경찰 추산·주최 측은 2만여 명 주장)이 참가한 가운데 26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한미 FTA 비준 무효’를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등 야 5당 대표의 연설이 끝난 뒤 오후 7시 40분경 ‘청와대로 진격하자’는 사회자의 외침을 시작으로 집회 참석자들이 불법 거리행진에 나섰다.

시위대가 두 시간가량 서울시의회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세종로 일대를 점거하며 불법 시위를 벌이자 박 서장은 오후 9시 40분경 직접 시위 대열의 선두에 있던 야 5당 대표에게 해산을 부탁하겠다며 시위대 뒤편에서 앞으로 들어갔다. 경찰 살수차량이 주차된 곳에서 나타난 박 서장은 근무복인 회색 점퍼 차림이었고 종로서 소속 경찰관 10여 명이 호위했다. 시위대는 박 서장을 발견하자 “매국노” “조현오 죽여라”고 외치며 박 서장의 머리와 뺨을 수차례 때렸다. 일부 시위대가 “폭력은 안 된다”고 외쳤지만 흥분한 시위대는 박 서장의 왼쪽 어깨 계급장을 뜯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복 모자와 안경까지 벗겨졌다.

▼ 폭행당한 서장 피신하자 파출소까지 쫓아가 “매국노” 욕설 ▼


주변에선 뭉친 신문지와 물병도 날아들었다. 박 서장과 함께 있던 종로서 소속 형사들이 “야당 의원을 만나러 가는 거다. 길을 비켜달라”고 항의했지만 달려드는 시위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여 분간 폭행당한 박 서장은 시위대가 단상으로 사용한 화물차 뒤쪽까지 밀려 쫓겨났다. 시위대열에서 빠져나온 박 서장은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로파출소까지 150m를 달려가 몸을 피했다. 하지만 흥분한 시위대 중 몇 명은 피신하는 박 서장을 따라가 등을 밀쳤으며 박 서장이 파출소로 들어간 뒤에도 문 밖에서 “매국노 나와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시위대에게 맞아 윗입술이 부은 박 서장은 세종로파출소에서 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이동해 응급치료를 받고 다음날 새벽1시경 종로서로 복귀했다. 종로서는 당시 채증사진을 바탕으로 폭행에 가담한 김모 씨(54)를 27일 오전 경기 화성시 자택에서 긴급 체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남부지부 고문인 김 씨는 올해 8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미국대사의 차량에 물병을 투척했다가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김 씨에 대해 폭행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며 범행에 가담한 다른 용의자 검거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선 박 서장뿐 아니라 경찰 35명이 시위대를 막다가 골절상 등 부상했다. 일부 시위대는 물대포 사용을 막아야 한다며 살수차를 발로 차고 살수차 운전사를 위협해 끌어내리는 한편 차량 바퀴의 바람을 빼기도 했다.

○ 경찰, “폭행 가담자 엄중 처벌”


폭행사건의 파문이 커지자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은 27일 브리핑을 열고 “종로경찰서장을 폭행한 당사자와 불법 행위에 가담한 사람뿐 아니라 주최 측에도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강경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 청장은 ‘서장이 흥분한 시위대 앞에 근무복을 입고 나타나 폭행을 유발했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선 “경찰이 불법 행위를 제지하기 위해 정당한 공무집행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9조에 따르면 경찰관은 집회 또는 시위의 장소에 정복을 입고 출입할 수 있고 집회나 시위의 주최자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관의 직무집행에 협조해야 한다.

청와대와 한나라당도 박 서장 폭행사건을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국가질서 유지권을 상징하는 경찰 제복을 불인정하는 행위”라고 규정하며 폭행 가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날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제복을 입은 경찰 간부를 무참하게 폭행한 것은 경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냐”며 “법치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이번 공무집행방해 및 집단적 폭력행위는 법치국가의 기본을 부정하는 범죄행위로 결코 묵인할 수 없다”며 “엄격한 법의 잣대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시위 당일 현장에서 불법 시위에 가담한 19명을 연행해 도로를 점거한 남자 중학생 1명과 여고생 2명은 훈방하고 나머지 16명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 중 경찰관 폭행에 가담한 5명에 대해선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를, 해산명령에 불응하고 도로점거에 나선 11명에 대해선 교통방해 혐의를 적용해 처벌할 방침이다. 이들 중엔 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생회장인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딸(21)도 포함됐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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