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부터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지만 유럽 명품업체들은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루이뷔통, 샤넬, 프라다 등 주요 업체들은 오히려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서 소비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 논리와 역주행하는 명품의 가격 인상에는 사치품 특유의 경제학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
샤넬은 올 5월 제품 가격을 평균 25% 올리며 유럽 명품업체들의 가격 인상에 불을 붙였다. 샤넬은 가격을 올리기 한두 달 전부터 매장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가격 인상 계획을 알려 오히려 홍보효과를 거뒀다. 마침 봄 결혼시즌이 겹치면서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자’는 샤넬 광풍이 불었다. 가격 인상 하루 전인 4월 30일에는 제품 재고가 남은 지방에 있는 백화점으로 ‘원정’까지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격 인상은 오히려 호재가 됐다. 13일 롯데백화점이 전국 29개점의 전년 동기 대비 명품부티크(패션+잡화) 매출신장률을 집계한 결과 올 4월에는 ‘샤넬 효과’에 힘입어 신장률이 67.5%로 껑충 뛴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평균 매출신장률인 10.6%와 크게 차이 나는 수치다.
가격을 올려도 소비가 줄지 않는 명품의 특성 때문에 업체들이 ‘마음껏’ 가격을 올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치품은 일반 소비재와 달리 구매 결정에 과시욕, 허영심 등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베블렌 효과’가 작용한다는 것.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은 명품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명품회사들의 가격 인상은 소비자 기대에 부응하는 전략적인 판단”이라고 말했다.
샤넬이 가격을 인상하면서 다른 브랜드들도 줄지어 인상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가격 인상은 브랜드 간 ‘자존심 대결’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경쟁사 제품의 가격이 먼저 오르면 자사 제품의 ‘격’이 떨어져 보일까봐 이에 맞춰 올릴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최근 혼수 시장에서 일부 유명 브랜드의 특정 아이템을 필수 혼수품으로 여기는 것도 각 업체가 ‘배짱’을 갖고 가격 인상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신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샤넬의 베스트셀러 ‘빈티지 2.55백’은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다른 제품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가격 인상에 대한 업계의 속사정
사실 EU 지역 브랜드라고 해도 이들이 FTA를 역주행하는 데는 사정이 있다. 올 2, 6월 두 차례에 걸쳐 제품 값을 올린 루이뷔통은 이번 FTA로 인한 관세 철폐 혜택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루이뷔통의 전 제품은 홍콩 물류지에 집하된 뒤 유입된다. 한-EU FTA에 따라 EU 국가가 아닌 지역을 경유하면서 부가가치가 발생하면 관세 철폐 효력이 없다. 최근 일부 제품의 가격을 올려 비난을 받고 있는 프라다 역시 홍콩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다.
명품업체의 본사가 국내 시장과 소비자를 아직 성숙한 단계로 보지 않는 게 내부적 ‘저항감’ 없이 가격 인상에 나서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해외 유명 명품업체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다. 명품의 국내 진출 역사가 10여 년밖에 안 된 만큼 소비자들의 브랜드 선택 기준이 ‘인지도’나 ‘고가(高價)’에 맞춰져 있어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명품업계의 원칙이 명품 원산지인 유럽, 미국에 비해 잘 통한다는 것. 트렌드컨설팅전문업체 PFIN의 이정민 이사는 “명품업체 본사는 진출 역사가 길어 브랜드 가치, 가격 대비 품질 등을 꼼꼼하게 따지는 성숙한 시장보다 신흥 시장에서 가격 인상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지사 차원에선 올리고 싶지 않으나 본사의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올리게 됐다고 털어놓는 업체도 있다. 프랑스 명품화장품 영업담당 B 부장은 “화장품의 경우 패션과 달리 백화점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편인데 백화점은 국민 정서 차원에서 가격 인상을 말리고, 본사는 올리라고 하니 난감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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