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검은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보여준 인내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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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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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도 시기심도 잊어라… 마지막에 웃고 싶으면

야코포 디 키멘티 다 엠폴리의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 앙리 2세(신랑)와 카테리나 데 메디치(신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교황 클레멘스 7세다. ‘검은 왕비’로 불리는 카테리나는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야코포 디 키멘티 다 엠폴리의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 앙리 2세(신랑)와 카테리나 데 메디치(신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교황 클레멘스 7세다. ‘검은 왕비’로 불리는 카테리나는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 메디치 가문의 딸로 검은 옷을 자주 입어 ‘검은 왕비’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카테리나는 적의 비방이나 무시, 욕설 앞에서도 적에 대한 증오심을 품지 않았다. 적을 미워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카테리나는 끈기 있게 적을 관찰하고 분석하다가 마침내 그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과감하게 실행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79호(4월 15일 발행)에서 카테리나의 리더십을 집중 분석했다. 주요 내용을 간추린다. 》
○ 프랑스 궁정에서의 굴욕

1516년에 피렌체의 실질적 영주로 등장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로부터 군주론을 헌정받았다. 하지만 로렌초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로렌초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가 작은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카테리나는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태어났다. 그러나 영웅의 생애는 비극이나 시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했던가. 카테리나는 태어나자마자 몇 주 만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성장했다. 카테리나를 돌본 사람은 작은할아버지였던 교황 레오 10세였지만 교황은 1521년에 임종을 맞이했다. 이후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에서 두 번째로 배출한 교황인 클레멘스 7세를 대부로 모시게 됐다.

카테리나가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며느리로 시집가게 된다. 프랑수아 1세는 당시 관습대로 엄청난 액수의 결혼 지참금을 기대했지만 이 기대는 곧 빗나갔다. 든든한 방어막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테리나가 결혼식을 올린 지 약 1년 만에 임종했고, 로마 교황청은 미지급으로 남아 있던 카테리나의 결혼 지참금 지불을 거절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프랑수아 1세는 “이 계집아이가 완전히 알몸으로 내게 왔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더구나 카테리나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눈이 툭 튀어나온 외모를 갖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후광이 사라지자 못생긴 카테리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남편인 왕세자 앙리 2세는 카테리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시 왕세자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람은 연상의 애첩 디안 드 푸아티에였다. 앙리 2세는 프랑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귀부인 디안의 무릎에 앉아서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랐다. 앙리 2세는 디안을 자신의 실질적인 아내로 생각했고 카테리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앙리 2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취임할 때 옆자리는 디안이 지켰다. 카테리나는 신하들이 서 있던 자리에 배정되는 굴욕을 당했다. 앙리 2세의 공식 결재 문장(紋章)도 앙리와 디안의 첫 글자를 딴 ‘HD’로 표시됐고 왕실 가족이 이동할 때 카테리나는 앙리 2세와 디안의 뒤에 서서 하녀들과 함께 행진했다.

그러나 시련과 외로움 속에서도 카테리나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천만금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조국을 떠났다. 바로 군주론이었다. 카테리나는 힘들 때마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눈물이 더 나오지 않으면 군주론을 펼쳐 들었다. 이 책에서 카테리나는 극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지혜를 배웠다.

○ 마키아벨리의 참된 제자


1559년 프랑스의 국왕이 된 앙리 2세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마상 창 경기를 열었다. 앙리 2세는 축제 참가자들을 즐겁게 하려고 기사(騎士) 놀이를 하다가 눈과 두개골이 창에 찔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두 여인이 앞으로 달려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물론 왕비 카테리나와 애첩 디안이었다. 디안은 쓰러져 있는 앙리 2세의 몸을 세게 흔들었지만 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이 사고로 죽게 되면 카테리나가 왕비가 되어 권력을 행사한다. 그동안 온갖 굴욕과 모욕을 참아왔던 카테리나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디안은 두려워했다. 프랑스 왕실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것을 직감하며 신하들도 납작 엎드려 섭정왕후 카테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엎드려 몸을 떨고 있는 디안과 신하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테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프랑스의 섭정왕후가 된 나 카테리나는 디안, 너를 용서하노라. 여기 죽어가는 내 남편이 너를 사랑했기에, 나도 너에 대한 사랑을 변치 않고 이어가리라.”

카테리나는 극적인 순간에 디안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디안의 하얀 목을 잘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카테리나는 여자 한 명을 죽여 과거에 입은 상처를 분풀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업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보복이 아니라 자비를 보여줌으로써 프랑스 국민 전체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테리나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갖고 있었다.

섭정왕후가 된 카테리나는 프랑스의 정치와 외교 정책을 평화 공존과 대화로 펼쳐갔다. 카테리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향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언제나 남편을 기리는 의미의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렸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난 후에도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카테리나는 1559∼1589년 30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검은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이끌던 천하 여걸이었다. 카테리나대에 이르러 모직산업과 은행업에서 출발했던 피렌체의 중산층 가문은 마침내 유럽 최고의 왕실 가문으로 거듭났다.

○ 검은 왕비가 남긴 교훈

아키텐 지방의 수석주교였던 브루주 대주교는 1589년 2월 4일에 열린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조사(弔辭)를 했다. 브루주 대주교는 카테리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검은 왕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다고 요약했다. 카테리나의 삶에 대한 적절한 평가였다.

‘지도자의 조건’을 쓴 프란체스코 알베로니는 이렇게 말한다. “전략적 사고는 단순화하는 기술이다. 불평불만과 탄식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또 주저앉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된다. 복수와 시기심은 잊어버려야 한다. 겁이 많거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피하는 게 좋다. 위선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조언자들은 무시해야 한다. 복잡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는 버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제안은 듣지 말아야 한다. 명료하고 쉽고 기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은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전략적 사고를 잘 요약하고 있다. 카테리나가 통치하던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위기의 시대를 헤쳐가고 있었다. ‘왕관을 쓴 괴물’들이 음모와 배신을 일삼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허물어뜨리고 있을 때, 메디치 가문의 딸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정리=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비즈니스 리더를 위한 고품격 경영 저널 DBR(동아비즈니스리뷰) 79호(2011년 4월 15일자)의 주요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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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경영 체계적으로 뿌리내리는 방법

▼ Special Report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 그는 부패 스캔들로 위기에 빠진 살로먼 브러더스(Saloman Brothers)의 경영 관리자로서 의회에 출석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다음 날 지역 신문의 1면에 실려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지 스스로 물어보게 한다. 회사를 위해 일하다 손실을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회사의 명성을 잃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직원이라면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할 때 가차 없는 처벌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이는 회사가 부정부패를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도 조직 구성원들이 이에 적극 동참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기업 윤리와 투명성,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지속가능 경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윤리 경영을 체계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성과 낮은 직원들을 춤추게 하려면…

▼ 중간 관리자를 위한 성과관리 코칭


A 전자연구소 회로설계팀 김 팀장은 입사 3년차인 이말단 사원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말단 사원은 성과평가에서 2년 연속 보통에 해당하는 B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최근 업무 의욕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심지어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말단 사원은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나름대로 실력을 갖춘 것 같은데, 성과는 기대 이하이다. 또 업무 만족도도 낮은 것 같다. 이말단 사원은 내년에 승진할 연차이지만, 현 상황으로는 진급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김 팀장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코칭 전문가인 김성완 통코칭 대표는 “소수의 20%가 조직을 이끌어 간다고 하지만, 다수인 80%의 행동이 없으면 성과는 창출되지 않는다”며 “20%보다는 80%의 능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힘을 쏟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는 팀의 직무를 분석해 ‘책무’와 ‘과업’을 바탕으로 업무 흐름도를 그려본 뒤, 직무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성과가 낮은 직원들의 성과를 높이는 방법을 제안한다.



조직문화 바꾸려는 CEO를 위한 제언

▼ Harvard Business Review


A 제철회사는 최대 고객사로부터 품질 불만을 접수했다. 그러나 공장 책임자는 ‘품질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직원들에게 되풀이했다. 하지만 지시는 막연했고,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이를 깨달은 그는 생산시설 관리자들에게 신속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공장을 선별하라고 지시했다. 또 그는 100일 안에 이들 공장 5곳에서의 품질을 얼마나 향상시킬지 구체적 목표를 정하게 했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할 책임자를 공장마다 한 명씩 임명했다. 프로젝트팀은 100일간의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실현할 로드맵을 작성했다. 각 공장의 프로젝트팀장은 “16번 생산라인 녹색 건조 분쇄기의 강도를 최소 5% 향상시킨다”는 등의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목표를 정했다. 공장 책임자는 각 공장 프로젝트팀장이 목표 달성에 대한 책임을 지게 했다. 100일 뒤 5개 공장 모두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했고 A사는 이 프로젝트를 모든 공장에 확대 적용했다. 조직문화를 개혁할 때 경영진이 유념해야 할 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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