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이 확전 일로다. 이 전쟁의 불씨였던 미국과 중국의 이른바 ‘G2 싸움’은 다소 진정되는 국면이지만 ‘흑자 선진국 대 적자 선진국’, ‘선진국 대 신흥 개발도상국들’로 전선이 넓혀졌고 마침내 한일 갈등으로 이어졌다. 환율 공방의 속성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아전인수식 ‘네 탓’을 하기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환율 문제 해결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한국도 일본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방어적 대책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한국은행이 14일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금융당국이 ‘외화유동성 단속’에 나선 것은 한국 정부가 처한 복잡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환율전쟁
“있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상황이다. 일본은 전형적인 물타기, 물귀신 전략을 쓰고 있다. 절대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14일 일본을 향해 격앙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이 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을 중국과 함께 외환시장 개입국으로 공개적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격한 반응이다. 경제부처의 다른 고위 관계자는 “일본의 속내는 ‘한국은 G20 의장국이니 원화 가치 절상의 모범을 보여라. 이에 따른 경제적 혜택을 우리(일본)가 좀 보자’는 것”이라며 “그런 의도가 읽혀서 더욱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다음 달 11, 12일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환율전쟁의 불씨를 잡아야 할 이유가 뚜렷하다. G20 정상회의 성공과 한국 경제의 지속성장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환율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중재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선이 확대되면서 피아(彼我) 구분조차 쉽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G2 갈등은 8∼1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적자 선진국 대 흑자 선진국’, ‘선진국 대 신흥 개도국들’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 흑자 선진국인 독일의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독일의 흑자는 환율이 아니라 국가경쟁력 덕분”이라며 “글로벌 불균형의 문제를 흑자국의 환율에서만 찾지 말고 적자국의 내부에서도 찾아야 한다”며 사실상 미국을 겨냥했다. 기두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1985년의 플라자합의 같은 국제환율관리체제가 없기 때문에 브라질은 인위적인 유입자본 조절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제 살길만 찾는 선진국들’을 공격했다. 인도 태국 정부도 “세계 시장의 유동성이 신흥 국가들에 쏠려 위협이 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겠다”고 밝혀 브라질과 같은 대열에 섰다.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서로 믿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화할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 환율전쟁 방어책 찾아 나선 한국 정부
한국 정부도 태국 브라질 등 다른 신흥국들과 함께 ‘외화유동성 옥죄기’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중수 한은 총재가 그간 시장에 기준금리 인상 신호를 꾸준히 보냈음에도 14일 결국 금리를 동결한 점이 대표적이다. 김 총재는 이날 금통위에서 금리를 동결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근 국제금융 상황이 절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 사안(환율)에 대해 많은 금통위원들이 고민하고 고려했다”며 “고뇌에 찬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하락(원화 가치 상승)하는 가운데 기준금리를 올리면 국내외의 금리 차가 커져 외국인 자금이 더욱 많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금리를 올리기가 부담스러웠다는 얘기다.
최근 금융당국도 외국인의 채권투자 이자소득에 과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11일 국회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채권 투자에 대한 원천징수세 면제 조치의 폐지는) 금융위 소관 사안은 아니지만, 관계 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민간 금융권에서도 넘쳐나는 외화자금을 줄여 나갈 방안을 찾고 있다. 대표적으로 은행들은 외화예금의 금리 인하 검토에 들어갔다. 넘치는 외화를 운용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금융위기가 터지면 풍부한 외화예금이 일시에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규모를 적절히 조정하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외화유동성 급증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 시중은행들이 최근 외화예금 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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