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고려를 지켜낸 참군인의 표상 양규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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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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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1010년 11월 거란군 40만 명이 압록강을 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이래 최대 규모의 침략이었다. 이론적으로 보면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고전을 해야 정상이었다. 거란은 만주 북부, 만주와 몽골의 접경인 초원 지대에 살던 유목민이다. 기병의 속도와 궁술을 이용한 기동전에 강했다. 그 대신 성 주위에 죽치고 앉아서 장기전을 해야 하는 공성전에는 약했다. 한반도에는 넓은 초원이 적고 산과 골짜기가 많다. 그 산마다 산성이 세워져 있다. 따라서 고려군은 평지에서 벌이는 야전보다 산과 산성을 이용한 수성 작전에 능했다. 강적이 쳐들어오면 마을과 평야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모두 요새로 들어가 농성전을 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보면 거란군은 이 땅에서 고전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침공 2개월도 되지 않아 개경에 입성했다.》
개경을 점령한 수십 만의 거란군
10일 만에 퇴각한 배경엔 그가 있었다

압록강 교두보 수비-보급로 차단 성공
군인의 의무 다한 뒤 장렬하게 전사
그러나 영웅에 대한 포상은 인색했다

인재가 없다고? 적임자 안보인다고?
경영자들은 불평하기에 앞서
인력 발굴-양성 시스템 있는지 반성해야


어떤 조직에서건 가장 소중한 구성원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이다. 경영자들의 책무는 바로 이런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그림은 송나라 때 매사냥을 하는 거란족 모습, DBR 자료 사진
어떤 조직에서건 가장 소중한 구성원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이다. 경영자들의 책무는 바로 이런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그림은 송나라 때 매사냥을 하는 거란족 모습, DBR 자료 사진
거란군의 예상 밖 승리는 정치적 판단에 치우친 고려의 총사령관 강조에게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강조는 선왕인 목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다. 어린 현종을 세우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거란이 침공해 들어왔다. 이에 강조는 고려의 전통적 장기인 수성전을 무시하고 통주성(현재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거란군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그가 전쟁을 오래 끌지 않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결전을 벌인 이유는, 자신의 취약한 기반을 생각할 때 장기전을 치르기도, 다른 사람에게 군대를 맡기기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단 하루의 전투로 고려의 주력은 몰살당했다.

주력군의 전멸로 야전에서 거란군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던 고려군은 각 요지마다 성을 지키며 거란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려고 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중간의 성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하를 계속해 급기야 1011년 1월 1일 개경으로 입성했다. 고려 국왕 현종은 간신히 나주로 피했지만, 수도 개경은 군대를 앞세워 고려를 침공한 거란 황제에게 넘어가 버렸다.

그런데 거란군은 개경에서 단 10일만 머물고 고향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자신의 괴뢰 역할을 할 새로운 통치자를 세우거나 군대도 남겨놓지 않고 모조리 빠져나가는 완전한 철수였다.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고려의 수도까지 점령한 마당에 그들은 왜 아무 조건 없는 철수를 감행했던 것일까?

이 갑작스러운 사태의 원인에는 한 장군의 분전이 있었다.

흥화진(현재의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산성으로 추정됨)에 주둔하고 있던 양규였다. 그의 직책은 고려의 서북면(평안도) 최고 사령관이었다. 항상 정치적 이해관계를 먼저 고려했던 강조와 달리 양규는 군인의 직무에 충실했다. 압록강을 도하한 거란군과 제일 먼저 맞붙었던 성이 흥화진이었다. 거란군은 일주일간 쉬지 않고 성을 공격했지만 고려군은 성을 사수했다. 흥화진은 압록강 나루를 감제하는 요새였으므로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하면 거란군의 압록강 교두보가 안전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거란군은 침공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을 이 지역에 남겨두고 절반의 병력만을 이끌고 남하해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큰 공이었지만, 남쪽의 고려군은 절반의 거란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러자 양규는 흥화진 수비대에서 700명을 차출해 거란군 수천 명이 주둔하고 있던 곽산성을 습격해서 탈환한다. 의주에서 개경까지 가는 동안 거란군이 확보했던 큰 성은 곽산과 안주 2개뿐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탈환한 것이다. 거란군이 아무리 식량을 자체 조달하는 자생력이 강하다고 한들 보급 기지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회군 이외에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보급로가 사라진 덕분에 거란군의 회군은 개선장군의 귀로가 아닌 고통스러운 후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고려군을 피해 이리저리 우회해야 했고, 식량을 현지 조달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시켜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는 다시 출전해서 거란군을 습격했다. 1월 17일부터 1월 28일까지 양규는 귀주성에서 온 김숙홍 부대와 합세해서 쉬지 않고 거란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1만 명에 가까운 거란군을 살해했고 6000명이 넘는 고려인 포로를 구출했다. 그러나 1월 28일 영변 부근에서 거란군과의 전투가 끝날 무렵, 거란 황제 성종이 지휘하는 거란군 본대가 하필 이곳에 나타났다.

거란의 대군에 포위된 양규는 후퇴를 거부하고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가 전 부대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규는 전사했지만 거란군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흥화진 수비의 성공과 곽산성의 탈환만으로도 양규는 최고의 포상을 받을 수 있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양규와 그의 동료들은 포상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무를 다했다.

군대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든 가장 소중한 구성원이 이러한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양규처럼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는 그런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양규와 같은 진정한 영웅을 발굴하고 포상하는 데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경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재가 없고, 적당한 인물을 찾아내기 어렵다면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는지, 인재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가치관과 포상하는 방법 및 기준이 적절한지를 먼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yhkmyy@hanmail.net

정리=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국내 첫 고품격 경영저널 동아비즈니스리뷰(DBR) 55호(2010년 4월 15일자)의 주요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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