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권하는 한국사회]돈 권하는 한국사회, ‘빚’과 그리고 그림자

  • 입력 2007년 6월 9일 03시 32분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이는 옛날 얘기가 아니다. 신용카드 빚으로 돌잔치하고 대학등록금 내고, 결혼하고, 집 장만하고, 자녀 교육시키고, 재테크하고…. 2007년 한국은 돈 없는 서민들에게 빚을 부추기는 사회다. 한국인의 경제 라이프 사이클 중 어느 것 하나 빚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게 없다. 직장인들 모임에서는 빚으로 집을 사 대박을 터뜨린 얘기가 무용담이다. 빚 없이 성실하게 저축하는 직장인은 “어느 세월에 집 사려고…”라며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각종 통계를 들여다보면 외환위기 이후 소득을 웃도는 소비 증가세가 고착화됐다. 소득 하위 20%의 저소득층은 매년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연 소득에서 이자 지출 등을 뺀 금액)의 50% 이상을 부채로 떠안는다. 한국인과 빚의 ‘동거’가 이상하고 위태롭다.》

○ 빚으로 시작하는 사회 첫발

2006년 가까스로 취업한 김모(29·여) 씨. 그러나 입사 후 1년 가까이 속병을 앓았다. 대학 시절 학자금으로 대출받은 2000만 원 때문이다. 연이율은 6.7%.

1998년 대학에 입학한 김 씨는 2학년 때 처음 학자금을 대출받았다. 3학년 때 500만 원을 추가로 빌려 6개월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4학년 때는 취업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그만둬 빚이 더욱 늘었다.

취업 준비 3년 만인 2006년 중소기업에 취직해 받은 월급은 150만 원. 매달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의 원금과 이자 30만 원은 그의 벌이로 만만치 않다.

김 씨는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빚 갚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 부동산 신화의 왜곡, 빚내지 않으면 바보?

2002년 결혼과 함께 경기 용인시에 30평형대 아파트를 구입한 이모(32) 씨.

월급이 300만 원 남짓인 그가 당시 가진 돈은 1억 원 정도였다. 이 씨는 은행 대출 1억7000만 원, 친지에게 빌린 1억 원, 2금융권에서 대출받은 5000만 원 등으로 4억2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5년이 지난 지금 월급 대부분이 이자로 들어간다.

맞벌이 부부인 그는 아내 월급으로 대출금을 갚아 나갈 작정이지만 주변의 또래 친구들은 “뭐 하러 갚느냐, 그 돈 있으면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라”고 권유한다.

이 씨는 “빚은 일단 없애고 봐야 한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뭐가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했다.

○ 자영업의 그림자

대기업에 다니던 박모(41) 씨는 2003년 당시 유행하던 컴퓨터 애프터서비스(AS) 전문점을 차렸다.

창업 당시 돈이 부족해 은행에서 2000만 원을 빌렸다. 그러나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임차료와 운영비를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일이 늘어났고 순식간에 빚은 40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박 씨는 2006년 말 사업을 그만두고 다시 중소기업에 계약직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은행과 카드사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회사마저 그만두고 지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다.

○ 잘못된 소비가 부른 빚

주부 도모(45) 씨는 공무원인 남편과 두 아이를 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도 씨는 6년 전 길거리에서 “생활용품을 보너스로 준다”는 말에 신용카드 3개를 만들었다. 신용카드가 있으니 당장 현금을 안 내도 쇼핑과 외식을 즐길 수 있었다. 써댄 돈은 신용카드 연체로 돌아왔고 신용카드 돌려막기와 함께 보험약관대출에도 손을 댔다. 빚은 올 초 6300만 원까지 늘어 가정불화에 시달리고 있다.

○ 노후 준비, 대책 없는 투자는 빚만 늘려

2003년 정년퇴직을 앞둔 회사원 최모(59) 씨는 A사 주식이 상장된다는 말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주식 투자에 나섰다.

여윳돈은 한 푼도 없었지만 “다니는 회사의 주거래은행에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동료들의 말을 듣고 2000만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했다. 여기에 보험회사에서 대출받은 1000만 원과 신용카드 대출 300만 원 등을 모두 주식에 투자했다.

그는 “아이 결혼 비용에다 노후 준비까지 생각하니 무리를 해서라도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상장 계획은 소문일 뿐이었다. 주가는 떨어졌고 최 씨는 투자 수익 대신 빚만 떠안게 됐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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