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노사관계 ‘역주행’]<下>파업키운 ‘무원칙 노사’

  • 입력 2007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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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타결” 환호성 17일 오전 11시경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집회를 마친 노조원들이 “협상이 오늘 중 타결될 것 같다”는 소문이 퍼지자 노조 집행부가 발행한 소식지를 던지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울산=최재호 기자
“협상타결” 환호성 17일 오전 11시경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집회를 마친 노조원들이 “협상이 오늘 중 타결될 것 같다”는 소문이 퍼지자 노조 집행부가 발행한 소식지를 던지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울산=최재호 기자
《지난해 12월 28일 윤여철 현대자동차 사장은 생산목표 미달에 따라 성과급을 50% 적게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이에 반발하며 1월 3일 시무식장에서 폭력사태를 벌였다. 폭력사태 직후 윤 사장은 “나쁜 관행은 없어져야 하며 원칙대로 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윤 사장의 원칙 대응 방침은 17일 노사 합의에서 반쪽짜리 원칙으로 결론이 났다.》

현대차가 원칙을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오랜 기간 무원칙한 관행들이 축적돼 한꺼번에 이를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파업이 타결되면 1980년대 말부터 전 노조원에게 ‘유급’ 휴가를 주는 관행을 10년 이상 지속해 왔다.

회사는 또 파업이 타결될 때마다 ‘일시금’ 등 다양한 명목으로 사실상 격려금을 지급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훼손되고 파업만 하면 휴가를 보내고 돈까지 주는 관행이 되풀이된 것.

노조는 떼를 쓰고, 회사는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이런 요구를 수용하면서 임시방편으로 한 해 한 해를 넘겼다.

노동연구원 조성재 연구위원은 “‘맨투맨(man to man)’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한 대화, 투명한 경영, 노무관리의 전문성과 일관성이 노사관계의 원칙”이라며 “현대차는 이런 원칙이 지켜지는 노사관계를 만드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툭하면 노무책임자 교체

2004년 6월 현대차 노조는 임금협상 과정에서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벌였다. 노조는 10.4% 인상을 요구했고 결국 7.8% 인상에 합의했다. 당시 협상에서 ‘품질개선격려금’이 새로 만들어졌다. 통상 급여의 100%를 별도로 지급하는 것. 사실상 협상타결 격려금이었다.

당시 협상을 총괄했던 임원은 이듬해 교체됐다. 협상과정에서 노조에 밀린 게 교체 이유라는 분석이 나왔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노사협상을 담당했던 회사 측 책임자는 5차례나 교체됐다.

2002년 5월 현대차 공장장 중 한 명이 ‘담당 공장에서 파업 찬반투표 찬성률이 높았다’는 이유로 면직됐다.

지난해까지 노사관계를 총괄했던 노동부 고위 관료는 “최고 경영진이 노사관계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소홀히 한 채 툭하면 노무관리 책임자를 갈아 치우니 소신껏 일할 임원이 누가 있겠느냐”며 “땜질식으로 원칙 없이 노조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20년째 반복됐다”고 지적했다.

○맨투맨 노무관리, 시스템은 실종

현대차에서 노조 간부들은 공장장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 공장장에 대한 평가 잣대 중 생산목표량이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노조원들이 작업을 중단하면 생산목표에 차질을 빚게 되고 이는 공장장 경질까지 초래한다.

임원급인 공장장 K 씨는 “노조가 생산을 중단시키지 않도록 평소 노조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부장 이상 관리자들이 노조 간부들에게 식사나 술을 접대하는 사례가 잦다.

최근 노조 대의원들과 술자리를 가진 D(45) 부장은 “식사 후 대의원들을 단란주점으로 모셨다. 30대 대의원들을 대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간부들이 작업장에서 목소리 큰 몇몇만 잡으면 내가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부 조합원과 인간관계 형성에 나선다”고 말했다.

이처럼 개별 인간관계에 너무 의존하는 노무관리 관행은 노사 관계의 원칙이 실종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1997년 현대차 울산공장 대회의실에 노사 협상대표가 마주 앉았다.

재무담당 임원이 회사 경영상태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마자 노조 대의원 한 명이 희롱조로 “위원님(노사협상위원), 입고 있는 티셔츠는 얼마짜리요?”라고 물었다.

당황한 임원이 “아내가 사 줘서 가격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노조 대의원은 “자기 옷값도 모르면서 무슨 임금협상을 하나”라고 핀잔을 줬다.

당시 협상을 지켜봤던 L 씨는 “인간적인 예의가 없이 무슨 노사 대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번 굳어지면 바뀌기도 어려워

17년차인 노조원 K(41) 씨는 지난해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 진단 결과는 퇴행성디스크였고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2005년 그의 연봉은 5300만 원이었으나 산재 판정 후 연소득은 7000만 원 남짓으로 늘어났다.

법에 규정된 산재급여와 장해보상비 외에 현대차 노사협상이 규정한 생계보조금(1989년 단체협상), 상여금(1970년대부터 관행), 부가보상비(2001년 단체협상) 등을 받기 때문이다.

생계보조금 등은 과거 큰 부상이 잦고 산재 판정의 범위가 매우 좁을 때 만들어진 제도로 현실과는 맞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대차 산재 담당자는 “산재 판정 때 일반 기업 노동자는 통상 임금의 70%를 받지만 현대차 노동자는 최고 140%를 받는다”며 “노조의 요구를 한번 받아들이면 수용한 제도를 개선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성재 연구위원은 “현대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노무관리 관련 컨설팅을 여러 번 받았는데도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며 “이번 협상타결에 만족하지 말고 최고 경영진이 상생(相生)의 노사문화 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GM대우-LG전자 “마음 열면 길이 보인다”▼

LG전자, GS칼텍스, GM대우자동차 등 한때 파행적인 노사관계를 갖고 있던 대기업의 노사관계가 상생(相生)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GM대우자동차는 2002년 4월 회사 출범 이후 5년째 파업으로 인한 생산 차질이 없다. 현대차 못지않은 강성 노조가 있던 GM대우차가 이렇게 변한 비결 중 하나는 투명경영과 근로자를 경영 파트너로 인정하는 문화에 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새 차가 나올 경우 언론 공개에 앞서 공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신차 발표회를 연다. 연간 2, 3회씩 부평, 군산, 창원, 보령 등 4개 공장에서 노조 조합원과 전 직원을 모아 놓고 경영설명회를 열고 웬만한 대외비는 직원을 믿고 공개한다.

노조원 김모(44) 씨는 “과거에는 회사 돌아가는 상황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임금 투쟁만 해 왔는데, 요즘은 모든 문제를 회사의 경쟁력 차원에서 먼저 따져 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LG전자는 1987∼89년 격렬하게 파업을 벌인 결과 창사 이후 처음으로 가전시장 1위 자리를 삼성전자에 내줬다.

1989년 부임한 이헌조 사장은 분위기 반전을 위해 임원들과 함께 매일 아침 출근하는 노조원들에게 “반갑습니다, 잘해봅시다”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신뢰경영의 출발이었다.

싸늘하던 노조원들도 인사가 2년, 3년 계속되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노조 집행부도 “다시는 1등을 빼앗기지 않도록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노조가 되자”는 분위기가 조성돼 노조 스스로 무상점검팀을 만들어 소비자 가정을 돌면서 서비스를 제공했다.

쇠파이프를 놓은 지 18년, LG전자 노사는 국내 1위에 만족하지 않고 2010년 세계 시장 3위를 목표로 나란히 뛰고 있다.

GS칼텍스도 2004년 파업 중 노조가 회장의 얼굴을 본뜬 인형의 목을 베는 참수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로 노사갈등이 극에 달했었다.

하지만 회사가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면서 노조는 현업에 복귀했다. 파업에 적극 가담한 노조원 600여 명에게는 정직 감봉 등의 징계를 내렸다. 온정적이던 회사가 처음으로 칼같이 원칙을 지킨 순간이었다.

회사 측은 파업 이후 1년에 4차례 경영현황과 국제 정유시장 동향, 회사의 경쟁력 등에 대해 상세히 공개하며 신뢰를 쌓아 왔다.

노조원들도 이때부터 ‘회사가 잘돼야 내가 산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한 노조원은 “무조건 떼를 쓰면 된다는 생각이 이류 노조의 시각이고 회사의 가치를 높여 그 이익을 서로 나누자고 회사에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일류 노조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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