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맥스소프트 창업 박대연 “MS와 한판 붙겠다”

  • 입력 2005년 9월 13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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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 기자
이훈구 기자
‘한국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이 나올 수 있을까.’

국내벤처기업 티맥스소프트가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회사의 주력제품은 각종 소프트웨어(SW)가 기업용 컴퓨터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미들웨어’ 소프트웨어.

그동안 이 분야는 IBM, BEA, 오라클 등 3개 외국 기업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티맥스소프트는 기술력 하나로 국내시장에서 외국의 골리앗 기업을 누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2010년까지 세계 3대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성장해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토양을 바꿔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밀어붙이는 티맥스소프트. ‘작지만 강한 기업’인 이 회사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소프트웨어 불모지를 개척하다

티맥스소프트가 설립된 것은 외환위기가 닥쳐오던 1997년 6월. 당시 한국외국어대 교수였던 박대연(朴大演·49·사진) 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소프트웨어 불모지인 한국을 바꿔 보겠다는 각오로 회사를 만들었다. 설립 당시 직원은 불과 5명. 사업 초기 벤처기업의 제품을 쳐다보는 고객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1999년 1년에 걸친 심사과정을 거쳐 국방부 납품에 성공하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고속성장으로 접어들었다.

시장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티맥스소프트는 지난해 국내 미들웨어 시장에서 점유율 29.6%로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253억 원. 올해는 2배 이상인 520억 원을 예상한다. 올해 매출액은 국내 대표적 소프트웨어 기업인 안철수연구소와 한글과컴퓨터를 웃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성과를 가능하게 한 건 연구개발(R&D) 노력. 이 회사는 매출의 15%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1999년에는 5000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회사가 더 성장해야 할 때’라며 4억 원의 연구개발 예산을 책정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연구개발센터는 회사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전체 인력의 절반 정도인 170명의 연구원이 이곳에서 근무한다. ‘연구 환경이 경쟁력’이라는 생각에서다.

○ 세계시장 브랜드 가치 제고가 과제

티맥스소프트는 최근 미국 오라클을 끼워팔기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오라클이 기업 자료를 통합 관리해 주는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DBMS)과 미들웨어를 묶어 DBMS만 팔 때보다도 싸게 팔았다는 것. 아직 공정위 판단이 남아 있지만 “미들웨어만 팔다가는 당할 수밖에 없다”는 티맥스소프트의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다.

이 회사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DBMS와 휴대전화 및 소형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내장형 운영체제(OS)를 직접 개발하는 데서 돌파구를 찾았다.

앞으로의 과제는 세계시장에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 기업의 모든 전산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을 팔기 위해서는 세계시장에서 회사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

티맥스소프트는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紙)’ 역할을 하고 있다.

▼야간상고 출신 은행원서 KAIST 교수로▼

“성공의 비결은 한 번 더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남보다 한 번 더 노력하는 겁니다.”

티맥스소프트의 창업자이자 최고기술자(CTO)인 박대연 KAIST 교수는 ‘야간상고 출신 교수’라는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전남 담양의 부잣집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작은 운수회사에서 사환 일을 봐야 했다.

광주에서 중학교와 상고를 야간으로 다니며 목표로 삼은 건 은행원. 당시에는 상고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면 은행에 무시험으로 들어가는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 성적 전교 1등으로 한일은행에 취직한 그는 은행 전산실에서 처음 배운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데 재미를 붙였다. 동생들이 학업을 모두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1988년 은행을 퇴직해 1300만 원의 퇴직금을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

퇴직금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1년 3개월. 그는 이 기간에 대학 학부과정을 마쳤다. 성적은 ‘올 A’. 지도교수가 “미쳤다”고 할 정도였다. 성적표를 손에 쥐자 장학금이 나왔고 계속 공부를 이어 갔다. 지금은 사업가로도 성공했지만 박 교수의 가장 큰 관심은 연구다. 그는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1000명의 천재를 키워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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