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해외투기세력 환율 줄다리기

  • 입력 2005년 3월 14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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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외환시장. 1004∼1005원대에서 움직이던 달러당 원화 역외선물환(NDF) 호가(呼價)가 개장하자마자 999원대로 떨어졌다. 한국시간으로 다음 날 오전 7시에 마감된 종가는 997원대.

이 영향은 2시간 뒤 열린 서울 외환시장에 고스란히 미쳤다.

외환딜러들은 물론 중공업 조선 전자업종 관련 수출업체들도 달러화 ‘팔자’에 나섰다. 순식간에 원-달러 환율은 1000원 선 아래로 떨어졌다.

‘역외(域外) 세력’이 원-달러 환율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날이었다. 11일과 14일에도 역외 세력이 떨어뜨린 환율을 당국이 떠받쳐 1000원 선을 지키는 양상은 계속됐다. 역외 세력 중에는 한국과 대만을 노리는 투기자금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외환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투기세력이 NDF 시장에서 900원대로 끌어내리면 외환당국이 서울 외환시장에 개입해 1000원 선을 유지하는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치열한 ‘환율 전쟁’=10일 오전 서울 외환시장. 뉴욕 NDF 시장의 영향으로 1000원 선이 무너진 원-달러 환율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발(發) 쇼크’를 만났다.

“보유 외환의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발언으로 도쿄(東京)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급락하자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원-달러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

서울에서도 원-달러 환율은 989.0원까지 떨어졌다. 결국 한국은행이 ‘칼’을 빼들었다.

박승(朴昇) 한은 총재가 “투기세력에 의해 환율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은 방치하지 않겠다”며 환율 안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동시에 한은은 달러를 사들이는 강력한 시장개입에 나서 23분 만에 원-달러 환율을 1008.0원까지 끌어올렸다.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에 한은이 사들인 달러화는 15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들어 1000원 선이 다시 위협받자 한은은 계속 달러화를 사들였다. 한은 외에는 달러화 ‘사자’ 주문이 거의 없었다. 결국 40억 달러(약 4조 원)가량을 쏟아 붓고 나서야 장은 끝났다.

역외 투기세력과 외환당국의 환율 전쟁은 한국 주식에 투자한 외국인들이 4조∼5조 원에 이르는 배당금을 본국으로 송금하기 위해 달러화를 본격적으로 사들이는 4월 초순까지 계속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NDF 거래의 실체=씨티, 체이스맨해튼 등 투자은행뿐 아니라 조지 소로스 씨의 ‘퀀텀펀드’ 등 단기 투기성 자금을 모은 헤지펀드들도 참여한다.

최근 NDF 시장에서 달러화 매도를 주도하는 세력은 헤지펀드. 그중에서도 미리 설계된 환율 변동 모형에 따라 자동적으로 매수 또는 매도 주문을 내는 이른바 ‘모델펀드’들이다.

모델펀드 외에 의도적으로 환율을 흔들어 보려는 세력도 일부 있는 것으로 금융계는 보고 있다.

서울 외국환중개 관계자는 “뉴욕 런던 싱가포르 NDF 시장의 사모(私募) 헤지펀드들이 원-달러 거래량이 적을 때 대량의 ‘팔자’ 주문을 내 가격을 출렁이게 하곤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먹잇감(?)=국제 투기자본의 노림수는 간단하다. 절상 압력을 받고 있는 통화를 사들여 절상속도를 가속시킨 뒤 적절한 시점에 처분해 차익을 남기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한수(金翰秀) 수석연구원은 “달러화에 위안화 가치를 고정시켜 놓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이나 대만처럼 당국의 시장개입이 잦은 나라도 투기세력의 타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수출이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통화가치를 낮게 가져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투기자본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

또 한국이나 대만의 외환보유액이 워낙 많아 당국이 달러를 사들이면서 환율을 방어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도 투기세력의 ‘입맛’을 자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은 오재권(吳在權) 외환시장팀장은 “어느 시장이나 전체 외환거래의 70∼80%는 투기성 거래”라며 “국내 시장의 진짜 문제는 역외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시장 조성자’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NDF시장 투기세력:

본국의 세제나 규제를 피해 다른 나라에 형성된 선물환 거래시장. 한국은 1999년 4월 허용했다. 미래에 주고받을 가격을 미리 정해두고 만기에는 차액만 교환하기 때문에 적은 돈으로 ‘한탕’을 노릴 수 있어 투기적 거래가 많다. 현재 원-달러 NDF 거래는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24시간 이뤄지고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시장은 서울 시간으로 오전 7시에 끝나는 뉴욕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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