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부자들이 떠나는 나라

  • 입력 2004년 5월 31일 18시 49분


“평생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요즘은 부자라는 이유로 욕을 먹고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내 돈 마음 편하게 써보려고 떠난다.”

최근 A시중은행의 프라이빗 뱅킹(PB) 담당자가 60대 고객에게서 들었다는 얘기다. 이 고객은 40억원대 자산을 모두 처분해 올해 안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날 계획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4월 말까지 해외로 보내는 증여성 송금이나 해외 이주비, 해외교포의 국내 재산 반출액을 합한 액수가 5조3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1% 증가했다.

특히 1∼4월 해외 이민자 숫자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35.7%나 줄었는데도 해외 이주비와 교포의 재산 반출액을 합한 액수는 28.2% 늘었다. 결국 올해에는 지난해보다 상대적으로 자산이 많은 ‘부자’들이 이민을 떠나고 있는 셈이다.

B시중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매달 5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 20여명이 이민을 떠나겠다며 돈을 빼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과거에는 이민을 떠나도 많은 재산을 한국에 남겨두었지만 요즘은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처분해 갖고 나간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맨해튼 등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한국인의 투자자금이 넘쳐나 집값과 상가 권리금이 폭등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국에서 큰돈을 들고 오는 ‘투자이민’을 환영한다.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일자리를 만들고 자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의 변신을 주도한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도 참고할 만하다. “부자들이 앞서가고 나머지는 따라간다”는 선부론은 중국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한 하나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한국은 이들 나라와 반대로 ‘부자가 떠나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부유층이 떠날수록 국내의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다. ‘부자들의 돈은 나눠 먹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질 때 ‘가진 계층의 탈출욕구’는 더욱 커지지 않을까.

박중현 경제부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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