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최병일/‘현대車 보호’ 명분 없다

  • 입력 2003년 8월 13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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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의 거센 파도가 한국호를 삼켜버리기 직전인 1997년 11월, 필자는 꽤나 영향력 있는 외국 신문에 국제규범에 어긋나는 미국의 한국 자동차시장 개방 압력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자동차 수출은 성장을 거듭한 반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 굴러다니는 외제 자동차는 여전히 희귀종이다. 1년에 150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는 한국에 수입되는 외제차는 연간 3만대에 불과하다.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인 한국에서 외제차의 한국시장 점유율은 2% 수준에 머문다.

정부가 쳐 놓은 보호장벽과 소비자들의 애국심 없이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길이 막연하다. 수입자동차에 부과되는 관세, 외제차 소유자에 대한 세무당국의 조사 등 유무형의 보호조치는 외제차가 국산자동차와 동등한 여건에서 경쟁하기 어렵게 만들어왔다. 국내가격보다 싼 수출자동차의 해외판매가격은 국내 소비자들이 보조금을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국내 자동차회사가 국내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무역과 투자로 경제를 일궈온 한국이 이러한 보호조치를 계속할 명분은 약하다. 그동안의 시장보호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지켜온 것인데 이제 정부는 보호장벽을 누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철폐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며칠 전 타결된 현대자동차 노사합의를 지켜보니 그런 확신이 든다.

1년의 절반에 가까운 휴일수, 1인당 실질소득으로 따져봤을 때 세계 최고수준의 임금을 받는 현대자동차의 국내시장 점유율(기아 포함)은 75%에 이른다. 비즈니스 위크가 최근 발표한 세계 100대 브랜드 기업 가운데 어느 기업도 정부의 보호 아래 이런 파격적인 시장점유율을 가진 기업은 없다. 물론 미국 일본 유럽의 내로라하는 자동차회사들이 모두 여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한국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삼성전자가 25위에 올라 있을 뿐이다.

해마다 머리띠 두르고 구호만 외치면 일 적게 하고 월급 두둑이 받는 노동자천국이 지속가능하려면 독점적인 지위 확보나 탁월한 생산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약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정부의 보호 아래 독점적인 사업자 지위를 악용한 ‘그들만의 잔치’라면 소비자나 하청관계에 있는 중소기업들이 받는 불이익과 상실감은 누군가가 보상해야 한다. 해마다 자동차가격 인상, 하청업체에 대한 납품가격 인하를 통해 그네들의 과도한 임금 인상을 소비자와 중소기업에 전가시켜 온 구태가 앞으로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들의 노사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난폭운전’은 교통경찰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가 나서서 막아야 한다.

46일간 팽팽하게 끌어왔던 노사 협상에서의 원칙을 일순간에 포기할 수 있는 경영진이라면 굳이 왜 그들의 경영권을 정부가 나서 보호해 줘야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합의 직후 현대자동차의 주가하락세는 이런 경영진에 대한 실망과 거부의 표시다. 정부는 지금까지 국산자동차에 제공해 왔던 온갖 보호 및 지원책을 중단하고 경쟁 촉진 정책으로 과감하게 선회해야 한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붉은 머리띠’들의 성난 함성이 요란하겠지만 우리 소비자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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