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세탁 1번지' 명동사채시장…고객이름은 '영감님' '회장님'

  • 입력 2003년 7월 1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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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시장 분위기=은행연합회관 골목길. ‘××상사’ ‘○○상사’라는 명패를 단 사무실이 줄을 잇고 있다. 사무실은 대부분 5평 남짓에 직원은 4, 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상사’들이 하루 거래하는 채권액은 수억∼수십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수년째 담당해 온 서울 중부경찰서 정보계의 형사는 “사무실 넓이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전주(錢主)를 챙기고 있느냐가 상사의 ‘명성’을 좌우한다”고 귀띔했다.

명동 한복판의 유네스코회관 빌딩. 국공채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20여개 업체가 몰려 있다. 서민을 대상으로 한 소액 급전 대출은 거의 찾기 어렵다. 이들 업체의 채권 거래량은 하루 평균 1000억원대에 이른다는 추정. 사채시장의 ‘큰손’들은 대부분 채권거래를 ‘주력사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받았다는 현대의 비자금과 김영완씨가 도난당한 채권 등이 모두 이 건물에 있는 S, I, H사 등 이른바 ‘5대 메이저’ 채권업체를 거쳐 돈세탁됐다. 이들은 한번에 200억원을 융통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오후 4시경 한 장년의 남자가 한 사채업체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른바 ‘묻지마 채권’으로 통하는 증권금융채권이나 고용안정채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이 남자는 “2004년이 만기인 1000만원권 채권 다섯장을 사겠다”고 했고 거래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사채업체 직원은 이름과 나이 이유 등을 전혀 묻지 않은 채 돈을 받고 묵묵히 채권을 넘겼다.

‘묻지마 채권’은 명동 고객들이 가장 선호한다. 프리미엄이 액면가의 50% 이상 붙어 비싸지만, 상환시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받기 때문이다. 한 채권업자는 “거부들의 유산상속과 정치 비자금 돈세탁에 이용되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비밀이 생명=고객의 신원은 철저히 비밀이다. 실제로 박 전 장관의 양도성 예금 증서(CD)를 세탁해 준 장모씨는 이 업계에서 ‘장 회장’ ‘영감님’ ‘할아버지’ ‘우성사장’ 등으로만 불린다. 한 사채업체 차장은 “그저 ‘회장님’으로 부르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라고 했다.

검찰,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도 자금 추적이 쉽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 사채업자들은 수표에 대한 배서나 채권번호 등 추적의 ‘실마리’를 아예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검은돈’의 해방구=명동 사채 시장에서 대부업을 신고한 업체는 120여개. 그러나 경찰은 미신고 업체도 100여개가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1994년 약 34조원(당시 국민총생산의 11.2%)이 조달되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당시 국내 총통화량의 26%가 명동 ‘지하금고’를 통해 유통됐다고 추정했었다. 명동은 전국 사채시장의 60∼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하자금의 실제 규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다.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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