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순익 크게 늘어난 대기업 자금운용 고민

  • 입력 2002년 9월 12일 17시 44분


현대자동차…. 현금 4조원가량. 빚을 미리 갚으려 해도 은행이 사절. 은행 역시 돈 굴릴 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대신경제연구소 김상익 애널리스트)

삼성전자…. 올해 7조원 넘게 이익을 낸다. 은행에 잠깐 맡겨 놓는 돈이 작년 4226억원에서 올해는 2조2000억원으로 늘어날 것 같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지면 곧바로 재투자할 수 있도록 비상 대기시켜 놓는 셈이다.(대우증권 정창원, 우리증권 최석포 애널리스트)

SK텔레콤…. 올해 순익 추정치는 1조7000억원. 신용카드 투자정보사이트 디지털방송 등의 지분을 적극 사들인다는 계획. ‘방만한 투자’라는 비판도 있지만 먹을 게 줄어든 이동전화사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 아닐까.(동원증권 양종인 애널리스트)

이 같은 사례와 같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대기업들은 번 돈을 어디에 쓸지 몰라 걱정이다.

외환위기 이후 내실 위주의 경영이 뿌리를 내리고 막대한 순이익을 내면서 나타난 새 풍경이다. 이젠 국내 기업들도 ‘어떻게 돈을 버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번 돈을 어떻게 굴리느냐’를 생각할 때가 된 것.

반면 2년 넘게 불황에 시달려온 정보기술(IT) 기업들은 한파를 버텨낼 만한 ‘실탄’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왜 고민인가〓몇년 전만 해도 이런 걱정은 없었다. 순이익이 아무리 많아도 빚을 갚으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빚을 바짝 줄여 놓으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과거 같으면 재투자에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요즘 국내외적으로 경기가 불안해 재투자 결정도 어렵다.

사업다각화를 위한 지분투자는 더욱 어렵다. 경영학 교과서는 “불황기에 과감하게 사업영역을 넓혀야 경기가 회복되면 시너지 효과를 누린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코스닥시장의 물을 흐린 ‘머니 게임’에 신물이 난 투자자나 주주들은 똑 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지분투자를 용서하지 않을 태세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보니 SK텔레콤처럼 잘 나가는 거대 기업도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이 때문에 올 들어 지분투자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관련사업 분야를 벗어나지 않는 신중한 양상이 두드러졌다.

투자가 어렵다면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들에게 경영 성과를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다. 리캐피탈투자자문 이남우 대표는 “사주(社主)나 대주주들은 배당을 해봤자 배당소득세를 너무 많이 낸다고 생각하므로 내키지 않아 한다”고 말했다. 대주주들은 세법상 최고 세율인 39.6%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자사주 매입으로 주가를 끌어올릴 수도 있다. 주가가 올라만 준다면 주주들은 평가이익이 커져서 좋고 기업은 나중에 증자할 때 자본금을 많이 늘릴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증시가 불안해서야 주가가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

올 들어 중간배당제를 도입한 회사가 늘었다. 하지만 ‘기업활동의 과실을 기업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본격적인 의미의 배당은 아니라는 평이다. 선심성이거나 주가 하락에 대한 주주 불만 무마용이라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돈이 남아돌아 생긴 기업의 고민은 결코 흐뭇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업들은 투자를 해서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다. 불황으로 재투자 길이 막혔는데도 마땅히 돈 굴릴 곳이 없다는 것은 국내 자본시장이 기업들의 역량을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들은 헤지펀드 등 새로운 자금 운용처를 찾아 나설 것”(우리증권 이순철 연구위원)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기업의 외도와 불투명한 거래에 수없이 당해온 투자자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동원증권 강성모 투자분석팀장)이라는 반론에도 일리가 있다. “이런 고민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운 것”(교보증권 임송학 투자전략팀장)이라는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세계경제가 정치 안보적 불안요인으로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갈수록 더 많은 현금을 비축해 둬야 할 것이라는 충고가 많다.

▽투자 포인트〓기업이 재투자를 결정했을 때 주가는 기업 역량에 대한 평가와 지배구조에 대한 판단이 동시에 작용해 움직인다. 이 때문에 유능한 기업이 의욕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사주 매입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게 좋다. 모든 자사주 매입이 ‘주가부양’을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혹은 직원들에게 우리사주를 상여금으로 주려고 자사주를 매입하는 경우도 있다. 주가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에도 함정은 있다. 간혹 대주주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갖고 있던 지분을 팔 때 이것을 받아주려고 자사주 매입을 하기도 한다.

일부 IT기업의 현금보유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현금이 사업의 과실이라기보다는 흥청망청했던 코스닥 머니 게임의 찌꺼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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