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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1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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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랑이 수십 년까지 이어진 데는 품질과 맛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눈과 손을 붙들어매는 ‘외모’도 한 몫 했다. 장수 상품들은 시대상에 따라 바뀌는 소비자의 취향과 선호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변신시켜왔다.
▽60년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부 이후 서서히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빈부 격차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이 아닌 탄산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롯데 ‘칠성사이다’의 갈색 병은 아이들 소풍가방 속에 담긴 자랑거리였다. 갈색 병은 음료의 투명함을 더욱 강조했고 갈색 병을 통해 나오는 맑은 탄산음료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매년 100여 편씩 상영되던 한국 영화는 신성일 등 수많은 청춘스타를 배출했고 이렇게 탄생한 스타들은 소비자에게 서양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전파했다. 화려함에 눈뜨기 시작한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해 화장품 용기는 꽃 모양 등의 장식으로 몸을 감쌌다. 그러나 라벨의 화려한 장식에 비해 용기 자체는 건조한 느낌의 직사각형이 대부분이었다. 진로 소주병은 ‘진로’라는 글씨가 병에 돌출되도록 새겨 넣어 손으로도 제품명을 느끼도록 했지만 시각적 요소는 거의 없었다.
▽70년대〓초고속 경제성장으로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커진 만큼 초기 히트상품을 따라가는 비슷한 경쟁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용기나 외관 등 제품의 디자인이 처음으로 제품 경쟁력 결정 요인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제품은 화장품 용기였다. 태평양 아모레 ‘삼미로숀’의 용기는 허리가 잘록하고 위쪽이 볼록한 형태로 전통 도자기를 본뜬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직사각형 용기만으로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시대가 온 것.
칠성사이다의 병은 날씬하고 투명해졌다. 통기타 문화에 빠진 청년들에게 ‘맑음과 투명함’은 부패한 상류층에 대한 저항으로 통했고 칠성사이다의 무카페인, 무인공색소, 무인공향의 3무(無) 전략이 병에 반영됐다.
진로 소주의 라벨에 젊은 색으로 인식되던 파란색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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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은 많은 사람이 쓰는 동일한 모양의 제품에서 남들과 다른 모양의 제품을 원했다.
치열한 개성 경쟁은 지난 시대보다 몇 배나 많은 용기 디자인들을 시장에 쏟아냈다.
컬러TV의 등장으로 소비자들의 색감이 크게 높아지자 제조업체들은 제품 자체와 용기에 수많은 색을 입혀보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색은 어떤 것인지, 색상 하나 하나가 가지는 이미지와 느낌은 어떤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같은 제품에 다양한 크기의 용기들도 선보였다. 진로소주는 300㎖ 유리병 외에도 200㎖ 종이팩 용기를 내놓았고, 사이다 콜라 등 탄산음료 시장에서는 유리병 대신 캔과 플라스틱 PET병들이 인기를 끌었다.
▽90년대〓가수 서태지로 대변되는 힙합문화에 빠진 10대들과 TV드라마 ‘모래시계’의 뜨거움을 이해하는 30, 40대가 공존했다.
소비자의 요구는 점차 세밀해지고 변덕스러워져 제품의 생명주기가 갈수록 짧아졌다. 신제품으로 출시된 지 한 달도 안 돼 또 다른 신제품에 밀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장수 상품들은 자신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오면서 유행에도 달라지지 않는 소비자의 근본적인 선호를 파악했기 때문.
LG생활건강의 ‘페리오’ 치약은 90년대 10년 동안 겉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진로 마케팅팀 장승규 과장은 “장수상품은 수십 년 동안 소비자들과 ‘사귀어’온 탓에 각자 분야에는 다른 상품들이 알 수 없는 소비자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장수상품들의 최근 디자인은 그 상품의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