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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5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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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 만큼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소재로 삼은 광고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受胎告知·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림)’에 단 한 줄의 카피만을 붙인 광고다.
수태고지를 소재로 삼았다면 과연 어떤 제품을 광고하는 걸까?
▽가브리엘을 무안하게 만든 상상력〓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잉태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건 성경의 얘기. 광고는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살짝 바꿔 버린다. “고맙습니다만, 이미 알고 있습니다.”
광고의 오른쪽 아래 부분을 살펴보자. 여기에 보이는 상품은 ‘클리어 블루(Clear Blue)’라는 임신진단약이다.
여기서 누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단 한마디의 카피로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을 임신진단약 광고로 바꿔버린 것이다. 단 한줄의 반전으로 말이다. 먼 길을 날아온 천사를 무안하게 만든, 성모 마리아가 임신진단약으로 미리 잉태를 알아차렸다는 기발한 상상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금기’라는 우상(偶像)을 숭배하지 말지어다〓‘정말로 끝내주는 상상력이군! 그런데, 종교계에서 이런 걸 보고 가만 있을까?’ 이것은 우리의 제작 회의실에서 반드시 나올 만한 말이다.
‘종교와 정치는 건드리지 말아라!’는 광고 교과서 어디에도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불문율로 정해져 있다.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회의실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금기’라는 자체 검열에 의해 삭제된다. 광고인들의 ‘금기 노심초사증’은 심지어 ‘광고주가 싫어하기 때문에’나 ‘대중의 정서에 어긋나서’ 등 ‘회피의 종착역’으로 치닫기까지 한다.
자유분방한 서양사람들이라고 성모 마리아를 희화화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와 ‘클리어 블루의 수태고지’ 그 둘의 양립을 허용할 줄 아는 그들에게서 의식의 건강함을 읽게 된다. 진정한 창의성이란 금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도를 수용하는 탄력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표 문 송(대홍기획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