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조사 발표를 보는 시각]재계 '숨은 의도' 의혹 제기

  • 입력 2001년 6월 21일 18시 46분


지난해 4월 16대 총선이 끝난 직후 정부 고위관계자가 국세청이 재벌그룹을 상대로 세무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기업들은 발칵 뒤집혔다.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한숨을 돌리려던 터에 세무조사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왔는지 배경을 알아내기 위해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여당의 선거자금 모금에 협조를 하지 않은 데 대한 응징일 것’ ‘여당 패배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만만한 기업들의 군기부터 잡으려는 것’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정부측은 곧바로 “일상적인 과세 활동의 일환일 뿐이며 특별한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재계는 이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굴절의 사례’를 워낙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20일 대(對)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경제계는 또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기업경영 과정에서 갖가지 명목으로 조사를 받는데 익숙한 처지지만 이번 조사의 경우 투입인원과 조사강도, 추징액 규모 등이 통상적인 ‘기업상식’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기 때문.

A그룹의 한 임원은 “매출액이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한 언론사에 ‘재벌급 세무조사’를 실시한 셈”이라며 “물증은 없지만 세무행정의 측면 외에 다른 의도가 개입한 의혹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재계는 세무조사와 이에 따른 세금부과가 정부의 정당한 행정행위라는 점에서 존중돼야 하지만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이번 조사에서도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굴절된 세무조사의 역사〓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91년 정치 참여를 선언한 뒤 현대 계열사는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았다. 당시 현대 계열사와 정 명예회장은 1361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당시 한국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로서도 세무조사의 타격은 컸다.

공기업인 포항제철도 정치적 의도의 세무조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포항제철과 박태준씨는 793억원의 세금을 부과받았다.

95년엔 SK가 시련을 겪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연임된 뒤 정부가 추진중인 업종전문화 시책의 문제점을 강도높게 비판했다가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정치적 의도 흔적 뚜렷〓B그룹 관계자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켜보면서 교통경찰의 함정수사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수십년 동안 세무처리 관행에 대해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작심이라도 한듯 한꺼번에 모든 언론사를 들추는 것은 적발실적을 올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아무리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했더라도 조사방식과 규모, 시기 등에서 조사 대상자로부터 최소한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성공한 조사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부원장은 한국 세무조사의 문제점으로 정치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집권층이 조사권을 ‘전가의 보도’로 삼으려는 유혹에 빠지는 점을 꼽았다.

그는 “대기업 세무조사의 뒷배경을 들여다보면 늘 숨은 사연이 있었다”며 “언론사가 세무조사의 성역이 돼서도 곤란하지만 숱한 업종 가운데 굳이 언론사만을 겨냥한 것도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단일업종에 대한 무차별적 세무조사가 과연 정책집행의 우선 순위를 합리적으로 따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전경련 이승철 상무는 “고소득 전문직처럼 세수증대 효과가 큰 분야를 제쳐두고 막대한 인력을 언론사 조사에 투입한 것이 국가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4대그룹의 구조조정본부장 C씨는 “미국에서는 세무조사가 기업이 세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업무미숙으로 빠뜨리는 부분을 지적해 계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국은 ‘손보기’ 차원으로 남용된다”며 “시대변화에 맞춰 세무조사 대신 세무지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