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이대로 좋은가]돈없고 기술없어 투자 애로

  • 입력 2001년 3월 6일 18시 54분


“디지털가전 분야는 기술 진보 속도가 워낙 빨라 잠시만 방심하면 경쟁에서 탈락한다. 남이 흉내내지 못할 핵심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삼성전자 진대제사장)

“자동차산업은 기술력 있는 업체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다. 투자를 연구개발(R&D)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현대자동차 이계안사장)

주력 업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R&D와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몇몇 예외적인 사례를 빼면 기업들은 여전히 투자에 소극적이고 R&D에 인색하다.

한 중견그룹 임원은 “외환위기 때 자금 압박으로 고생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총수의 결단이 없는 한 뒷전으로 밀린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에 범용, 소형, 단순 조립품 위주인 한국 제품은 세계 시장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주특기가 없다〓한국이 선진국과 후발국 사이에서 협공 당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한국 기업이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특출한 제품이 몇 개 안 되기 때문.

조선업종은 지난해 세계 선박 수주량의 50%를 차지하면서 앞으로 2∼3년간의 일감을 확보했지만 수익성 악화로 고민하고 있다. 탱커 컨테이너 등 일반선이 수주 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특수 목적선 비중은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핵심 부품 의존도 심화〓가전업체의 디자인 담당자들은 일본제를 모방한다는 비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핵심 부품을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완제품의 모양도 자연스레 일본제와 흡사한 모양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한국의 간판 산업인 반도체의 경우 재료 자급률은 55% 정도이고 장비도 미국 일본 등에서 대부분을 수입해 자급률이 13%에 불과하다. 반도체를 팔면 팔수록 수입액이 불어나는 딱한 구조다.

정보통신 분야도 일반 부품은 국산으로 충당하지만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핵심 부품은 거의 수입해서 쓴다. PC는 매출액의 12%, 디지털 TV는 11%를 기술사용료로 꼬박꼬박 지불해야 한다. IMT―2000(차세대 이동통신) 사업이 본격화되면 매출의 5∼10%를 역시 로열티로 내야할 전망.

기술경쟁력이 떨어진데는 무엇보다 기업들의 책임이 크다. 노키아의 이동통신 개발 인력은 한국 업계 전체의 개발 인력보다 3배나 더 많다. 철강업계의 R&D 투자는 매출액 대비 0.6%로 일본의 1.84%에 크게 뒤진다.

기업들은 “가뜩이나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가 금융 일변도의 정책을 펴는 바람에 자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진 것도 연구 개발을 위축시키는 데 한몫했다”고 주장한다.

▽무리한 정책으로 투자 의욕 위축〓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제조업의 활기를 떨어뜨린 주범으로 부채비율 200%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8%를 획일적으로 적용한 것을 꼽는다.

개별 업종과 기업의 특수성이 무시되는 바람에 경쟁력 강화에 꼭 필요한 투자도 주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빚었다는 것.

삼성경제연구소 장성원 수석연구원은 “이제는 기업 금융의 부실을 털어내는 데 치중한 구조조정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쪽으로 바꾸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박원재·김동원·하임숙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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