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회장 "어렵다면 서산농장 팔라" 몽헌씨에 허락

  • 입력 2000년 11월 3일 18시 34분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은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에게 서산농장을 팔아야 한다고 설명하기 위해 첫마디를 어떻게 꺼냈을까.

‘왕회장’의 서산농장에 대한 애착은 잘 알려진 사실. 그는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서산농장은 내게 농장 이상이다. 내가 마음으로, 혼(魂)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나 혼자만의 성지(聖地)다’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한 아버님께 바치는 아들의 선물’이라고 밝혔다. 현대측은 3일 “정전명예회장이 ‘현대건설이 정말로 어렵다면 서산농장을 팔아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서산농장 매각에 대해 현대맨들의 복잡한 정서적인 반응과 달리 자금시장 관계자들은 “서산농장은 왕회장 개인 재산이 아니고 현대건설이라는 법인, 즉 주주들의 재산이며 서해안 간척사업은 시장논리로는 실패한 프로젝트였다”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정주영과 서산농장〓왕회장이 서산간척지 매립을 구상한 것은 70년대말 중동건설경기가 퇴조를 보일 때부터. 해외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막대한 양의 건설장비를 활용할 방안으로 간척사업을 구상한 것. 그는 “농경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에서 민간기업이 나서서 애국적 견지에서 간척사업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현대건설은 82년 공사를 시작해 84년 방조제 건설작업을 끝냈다. 84년 2월 유조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사의 TV 중계는 일반인의 뇌리에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깊이 새겨넣었다. 그는 서산만의 물살이 너무 거세어 물막이공사가 어렵게 되자 못쓰게 된 유조선을 바다에 침몰시켜 물의 흐름을 늦추는 데 성공, 방조제 건설작업을 조기에 완성시켰다.

이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미국의 뉴욕타임스 및 뉴스위크지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왕회장의 빗나간 계산〓일반인에게 서산농장은 항공기로 씨를 뿌리고 헬리콥터로 농약을 뿌릴 정도의 기계화된 농장 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모든 사안을 계산기를 두들겨가며 평가하는 기업인에게 서산농장은 ‘악몽’에 가깝다.

6400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3000여만평의 간척지에서 지난해 생산된 쌀은 25만8300가마. 현대측은 이 쌀을 팔아 86억원의 이익을 냈다. 공사비 이자만 감안해도 매년 5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낸 셈. 자본투입의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는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왕회장의 성격을 감안해볼 때 그는 훗날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 서산농장의 일부를 용도변경시켜 울산 같은 공단을 조성할 계산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한 공장용지에 대한 수요 감소, 환경에 대한 인식 변화로 인한 용도변경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왕회장의 계산은 빗나가고 말았다.

왕회장은 평소 “땅은 결국 후손들에게 돌아간다. 당대엔 자금이 한없이 투입되고 이익을 보상받기 어렵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후손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그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서산농장의 운명을 내다본 게 아닐까.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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