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재벌해체]나누되 '느슨한 협력'은 유지

  • 입력 2000년 6월 4일 19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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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애정과 미움이 공존하는 ‘애증의 대상’이다.

70∼80년대 세계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면서 빈곤 탈출과 고도 성장을 이끈 경제 개발의 일등 공신인 동시에 오너 일가의 경영 전횡과 정경 유착을 통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나라 경제를 망친 주역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새 시대를 맞아 재벌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3부자의 경영 퇴진 발표는 재벌이 주도해온 우리의 경영 방식에 큰 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현대의 이번 조치가 진정한 재벌의 일선 퇴진인지 아니면 자금난을 극복하는 일시적 술수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재벌의 경영 및 지배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것으로 보인다.

▽재벌 개혁이냐 재벌 해체냐〓현대 사태 이후 재벌 문제에 대한 정부측의 미묘한 태도 변화는 용어 선택에서부터 감지된다.

작년까지만 해도 재벌 해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사실상의 금기 사항.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표현도 자칫 재벌 총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해 “전문 경영인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우회적 어법으로 대신해 왔다.

요즘은 이같은 용어들이 사석에서나마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정부는 물론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정부의 개혁 복안〓조원동(趙源東)재정경제부 정책조정심의관은 “정부의 관심사는 재벌개혁이지 재벌 해체가 아니며 재벌 개혁의 큰 틀을 정할 종합적인 밑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의 임무는 상호 출자 등을 통해 얽혀 있는 계열사간 관계를 정상화해 책임있고 투명한 경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일 뿐 각 재벌 집단의 지배구조는 해당 그룹이 특성에 맞춰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현재 정부가 상정하는 재벌의 중장기 미래상은 기존 계열사가 업종별 소그룹으로 분할되고 이들 간에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지배 구조 개선을 통해 전문 경영인이 경영을 주도하는 책임 경영 체제를 확립하는 것. 소그룹 분할로 선단식 경영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느슨한 협력 관계를 통해 기존 재벌 시스템의 시너지 효과를 지속적으로 확보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압력에 의해 재벌 체제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델로 바뀌어야 한다는 희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재벌〓재벌의 사실상 해체를 주장하는 논리는 개발 경제에서 디지털 경제로 경영의 패러다임이 바뀐 만큼 또 한번의 도약을 이루려면 새로운 기업 모델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 반면 제한된 자원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재벌 체제의 강점은 어떤 형태로든 이어가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대 사태 와중에도 재벌 계열사는 오히려 늘어났다. 30대그룹 계열사는 4∼5월중 21개가 새로 편입되고 5개사가 제외돼 총 계열사수가 544개에서 560개로 16개 증가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등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대기업들의 진출 열기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만큼 우리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

이번 사태는 재벌들이 △폐쇄적 수직적 위계 구조 △총수 가족의 독단적 의사 결정 △과다한 차입과 방만한 사업 확장 등 구시대적 잔재를 청산하지 않는 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선단식 경영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벌을 개별 기업으로 떼어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면서 색다른 비유를 내놓았다. 화재가 발생할 때는 불길이 삽시간에 번지게 돼 선단식이 불리하지만 강풍이 불 때는 선박들을 묶어 놓는 편이 피해를 줄이는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재벌 해체라는 명분에 얽매여 모범 답안 마련에 집착하기보다는 상황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쪽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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