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재벌해체]"주주가 경영 감시해야"

  • 입력 2000년 6월 2일 19시 41분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3부자의 경영일선 퇴진 발표는 오너일가가 그룹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황제경영’을 종식시켜 전문경영인 체제의 정착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는 기대감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우리 기업문화의 특수성과 제도적 미비점 등을 감안할 때 섣불리 전문경영인 체제의 확립을 낙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한국에 진정한 전문경영인이 있는가〓정명예회장은 한국 재벌의 전근대적 오너중심 경영을 상징하는 인물.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의 경영 능력으로 굴지의 기업집단을 일궈낸 대표적 전문경영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반된 성격을 갖고 있는 그가 재벌해체와 전문경영 인체제 도입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은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그만큼 복잡하고, 따라서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음을 증명한다.

현대 삼성 등 재벌그룹의 상층부에는 이른바 ‘전문경영인’으로 분류되는 임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번에 정씨일가 퇴진의 불씨를 제공한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무늬만 전문경영인’일 뿐 해당업무에 정통하고 전략적 결정을 내릴 역량을 갖춘 ‘진정한 전문경영인’으로 보기는 곤란하다는 게 재계의 평가. 기업풍토상 총수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으로 버틴 ‘가신형’ 경영인일수록 진급코스를 밟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 스스로도 한계를 고백한다. 재벌그룹 핵심 계열사의 L사장은 “솔직히 중요한 전략적 판단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루게 된다”면서 “나중에 잘못될 경우 책임추궁이 걱정되는데다 오너처럼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때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추앙받았지만 끝내 ‘실패한 전문경영인’으로 기록된 사례도 많다. 기아자동차 부도의 멍에를 짊어지고 퇴장한 김선홍(金善弘) 전회장이 대표적인 예. 대우그룹 임원 중에도 무리한 사업확장에 따른 위험을 제때 경고하지 못하고 총수의 뜻에 맹목적으로 순종해 회사 부실을 초래한 이가 적지 않다.

▽시장의 적극적 감시로 해법 찾아야〓결국 중요한 것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주주 이익 및 기업가치 극대화에 전력할 시스템을 갖췄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영기(金永琪)선임연구위원은 “전문경영인의 자격 요건을 따질 때 ‘오너냐, 오너가 아니냐’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면서 “경영능력이 뛰어나 주주와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을 올려주고 기업 가치를 높이면 유능한 전문경영인”이라고 말했다.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은 경영실적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함께 경영인의 잘못된 결정과 전횡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논리.

미국 포드사는 창립 70여년만에 76년 전문경영인을 영입했지만 98년 오너 체제로 복귀했고 모토로라사는 1928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창업자 자손들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재경부관계자서울대 권순만(權純晩)교수는 “대주주가 지분만큼의 권한만 행사할 수 있도록 지배구조를 정립하는 것만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정착시키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총지분이 5% 안팎에 불과한 오너일가가 상호출자 등을 통해 계열사의 의사결정 권한을 독점하는 연결고리를 끊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것. 전문경영인이 대주주의 눈치만 보지 않고 ‘시장’을 의식할 수 있도록 주주들이 기업경영을 적극 감시하는 주주행동주의도 오너일가의 전횡을 방지할 해법으로 꼽힌다.

<박원재·이명재기자> 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