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외환위기는 한보이후 계속된 대기업의 부도사태와 이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위기상황에서 현실경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적 실기(失機)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금융개혁법안의 국회처리를 놓고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이 벌인 논쟁은 「밥그릇 싸움」으로 비쳤으며 대선(大選) 표를 의식한 여야 국회의원들의 지루한 공방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불신감만 더해줬다.
외환위기의 출발은 대기업의 연쇄부도. 한보부도로 금융기관이 수조원의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은 작년말 8백44원에서 3월말 8백97원까지 치솟았다.
한보사태가 수습국면으로 들어가면서 환율은 4월이후 진정세로 돌아서 7월5일에는 8백87원까지 주저앉았다. 지난 5월 태국 등 동남아국가에서 발생한 통화위기 충격도 다행히 비켜갔다.
그러나 7월15일 기아사태가 터지면서 모진 비바람이 몰려왔다. 시장상황은 벼랑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환율은 나흘만인 19일 8백94원으로 급등.
기아사태는 한국경제의 추락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재계 8위의 거대기업인 기아호의 몰락은 특히 외국인투자가들에게 핵폭탄 같은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도 「설마 기아가…」라는 장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기아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금융기관은 해외에서 외화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졌으며 특히 국제업무에 설익은 종합금융사는 해외차입줄이 아예 끊겨버려 환율상승의 주범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국가신인도는 물론 시중은행의 장단기부채 등급을 일거에 떨어뜨려 차입난을 가중했다. 해외에서 돈을 빌리지 못한 금융기관과 기업이 국내 외환시장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환율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외환시장의 위기는 3개월여 동안 질질 끌었던 기아사태가 10월중순 법정관리신청으로 결론나면서 한풀 꺾이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외환시장은 10월20일경 발생한 홍콩 외환위기의 유탄을 맞아 다시 휘청거렸다. 홍콩 외환위기는 미국 등 전세계 주식시장의 연쇄폭락을 촉발했다. 금융시장의 최대 불안요인이던 기아사태의 해법(법정관리) 효과가 5일만에 사라진 셈. 10월말 환율은 9백65원으로 급등했다.
외국인들은 홍콩사태를 계기로 「한국도 외환 및 금융위기의 예외는 아니다」며 본격적으로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들은 10월 한달 동안 9천6백41억원, 11월 들어 17일까지 4천8백53억원을 팔아치웠다. 주가는 한때 4백70선까지 곤두박질쳤다.
환율은 17일 외환당국의 개입포기선언으로 가격제한폭(1천8원)까지 급등한데 이어 18일에는 아예 개장과 함께 상한선인 1천12원까지 치솟아 외환거래가 중단됐다.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신청이 공론화하기에 이르렀다. 17일에는 금융개혁법안의 국회처리 무산에 반발한 재경원이 환율을 담보로 의도적으로 손을 놓은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나돌았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의미.
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연구위원은 『기업부도와 금융기관 부실화로 경제상황은 갈수록 악화하지만 정부는 펀더멘털(기초)이 좋다는 등의 이유로 즉각적인 대응을 기피, 오늘의 어려움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