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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한시를 영화로 읊다] 〈132〉 시인이란 숙명

고려시대 이규보는 끼니도 거른 채 술 마시고 시만 써대는 자신의 집착이 병이 아닌가 걱정했다(‘詩癖篇’).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읽은 당나라 백거이 시에 마음의 위안을 얻어 다음과 같이 썼다.

백거이가 노년기 병고 속에 남긴 ‘병중시(病中詩)’ 연작을 따라 쓴 작품 중 한 수다(‘次韻和白樂天病中詩’15수). 백거이는 자신이 병든 뒤 더 시를 많이 쓰는 것을 보니 전생에 시 빚이 있는 것 같다며 시를 자신의 숙명이라고 읊은 바 있다(‘自解’). 시인 역시 병이 들자 평소보다 시를 두 배는 더 좋아하게 됐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옛사람도 그러하다는 사실에 걱정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심지어 사직을 앞두고 병가를 낸 기간조차 비슷하다며 우연한 일치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다(幷序).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은 할리우드 각본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은 할리우드 각본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년)에서 주인공 길도 자신의 현업과 소설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영화에선 시와 달리 자정의 종소리에 맞춰 자신이 동경하던 작가들의 시대로 타임슬립을 해서 직접 과거의 예술가들과 만나 자신의 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영화는 한편으로 ‘과거에 살고 싶은 사람들’, 곧 이전 시대에 살았으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은 1920년대를 이상적이라 여겼지만, 그 시대 예술가들의 뮤즈인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가 진정한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과거에서 이상을 찾고 위안을 받았다면, 시인은 옛 시인으로부터 해답을 찾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위안의 대상으로 삼았던 백거이 역시 전대 도연명에게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백거이의 시를 통해 자신의 고민을 해소했던 것처럼, 백거이는 이전 시기 도연명의 시에서 자신의 좌절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效陶潛體詩’16수).

영화 속 길은 결국 상업 작가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시인도 벼슬을 사직하고 앞으로도 시작에 몰두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시와 영화 모두 옛사람의 자취에서 갈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열망이 또 다른 나의 발견으로 귀결된 것일 뿐이다. 시인이란 숙명은 백거이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시#영화#고려시대#이규보#백거이#병중시#미드나잇 인 파리#예술가#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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