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日 원로 페미니즘 투사가 건네는 ‘따뜻한 바통’

  • 동아일보

일본서 여성학자로 활동한 저자
가부장제 등 性 고정관념에 대항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담아
◇느리게 마이너노트로/우에노 치즈코 지음·은혜 옮김/312쪽·1만9800원·후마니타스


일본의 유명한 여성학자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기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을 단조(마이너노트) 음악을 연주하듯 수필로 정리했다.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과 비혼에 대한 편견 등 일본 사회의 고정관념에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왔던 그가 내면에 웅크린 솔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꺼낸다.

저자는 “가부장제를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강했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을 당장의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했던 아버지에게 대항하기 위해 고고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아버지의 결벽증이 싫어서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나 앉는 생존형 인간”이 되거나 기독교인이던 아버지의 이중성에 반발해 무신론자가 됐다고 한다.

그런 ‘독불장군’인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장. 의사였던 아버지의 환자들을 문상객으로 만나며 저자는 그의 직업 정신을 다시 되짚어 본다. 일흔이 넘어서도 최신 의학 잡지를 뒤적였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버지도 못다 이룬 꿈이 있었겠구나 생각한다.

저자는 2019년 일본 명문 대학인 도쿄대 입학식에서 “이제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하는 사회가 기다리고 있다”며 도쿄대 내 여학생 비율이 20%가 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일본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성차별이나 구조적 차별을 축사로 꼬집었다. 당시 이 축사는 실시간으로 번역돼 중국 웨이보에서 수억 건이 조회됐으며, 한국 언론과 영국 BBC방송에서도 보도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이렇게 약자를 위한 사회를 만들자고 역설해 온 그가 이제 노년이란 또 다른 약자가 되어 털어놓는 감정은 의외로 부끄러움과 후회다. 저자는 자신의 미숙함으로 상처를 주거나 오해로 관계가 틀어져 버린 사람들과 죽기 전에 꼭 용서를 주고받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와 동료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추도사를 바치며, 다음 세대에게 부디 이 바통을 이어받아 달라고 당부한다.

“(바통을) 모쪼록 받아 주세요. 같은 노래를, 다른 목소리로,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이어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우리가, 확실히 넘겨받았기 때문에.”

#여성학자#가부장제#일본사회#페미니즘#성차별#비혼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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