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흑사병의 창궐이 신분제 없앴다

  • 동아일보

◇아포칼립스/리지 웨이드 지음·김승욱 옮김/452쪽·3만2000원·김영사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30∼60%를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도시와 마을은 순식간에 붕괴됐고, 공포와 혼란이 사회 전반을 뒤덮었다.

그러나 학술지 ‘사이언스’ 전문 기자인 저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종말이 아닌 변화의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노동력이 급감하자 살아남은 피지배층의 노동력 가치가 높아졌고, 지배층의 통제는 약화됐다. 그 결과 중세 사회의 경직된 위계 구조는 균열을 맞았고, 보다 평등한 질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책은 이처럼 인류가 겪어온 다양한 시대의 ‘아포칼립스’를 최신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복원한다. 저자는 이를 “한 사회의 생활 방식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집단적 상실”로 정의하며, 파괴 자체보다 그 이후 인간의 적응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극심한 상실 속에서도 기존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집트 고왕국의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장기 가뭄으로 나일강 범람이 멈추고 농경이 붕괴되자, 신성시되던 왕권은 약화됐다. 중앙집권 체제는 해체됐고 지역 단위의 정치 질서가 등장했다. 권력은 더 이상 신성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고,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통해 유지돼야 했다. 지역의 평민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억압됐던 창의력이 자유로이 발산됐다.

역사서에 ‘멸망’으로만 간단히 기록됐던 아포칼립스의 순간을 ‘실패’가 아닌 ‘적응과 재편’의 과정으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운 책. 팬데믹과 기후위기, 정치적 불안이 겹친 오늘날 역시 또 다른 전환의 시기일 수 있다. 재난을 단순한 파괴로만 볼 게 아니라 그 이후 어떤 변화가 가능해지는지를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흑사병#중세 유럽#노동력 가치#사회 변화#아포칼립스#이집트 고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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