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직면뒤 삶의 우선순위 달라져…“작품 대신 ‘대화와 관계’를 수집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15일 14시 33분


신타이베이시미술관(NTCAM)에서 만난 한 네프켄스. 글을 쓰는 작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네프켄스는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비디오 아트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있다. 한네프켄스재단 제공
신타이베이시미술관(NTCAM)에서 만난 한 네프켄스. 글을 쓰는 작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네프켄스는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비디오 아트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있다. 한네프켄스재단 제공
어느 크리스마스 날, 네덜란드 로테르담 조용한 마을의 6살 소년은 테이블에 가득한 선물을 보고 기뻐한다. 그중 영국산 미니어처 자동차 ‘딩키 토이’는 가장 마음에 든 선물이었다. 작고 검은 자동차를 보는 소년에게 엄마가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있단다. 그 친구들을 위해 선물 하나를 주는 건 어떠니? 그 선물은 네가 소중히 여기고, 조금은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어야 해.”

아이는 망설이다 장난감 자동차를 엄마에게 건넨다.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져가세요.”

약 40년 뒤 어른이 된 소년은 스위스 출신 예술가 피필로티 리스트의 작품에 매료된다. 2시간 넘게 몰입한 그는 이 작품을 소장한다. 다만 아끼는 장난감을 친구에게 주었듯, 그 작품을 수장고에 넣는 대신 공공 미술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수집한 작품 500여 점을 네덜란드 주요 미술관에 기증한 이가 작가 겸 미술 수집가 한 네프켄스(71)다.

대만을 찾은 네프켄스를 신타이베이시미술관(NTCAM)에서 10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으로 작품 기증 및 제작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엔 NTCAM, 벨기에 앤트워프 현대미술관(M HKA), 핀란드 키아스마현대미술관(Kiasma), 한국 아트선재센터 등 4개 미술관과 협업해 작가를 후원하는 ‘유라시아 무빙 이미지 커미션’ 프로젝트 발표를 위해 대만을 찾았다.

신타이베이시미술관(NTCAM)에서 만난 한 네프켄스. 글을 쓰는 작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네프켄스는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비디오 아트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있다. 신타이베이=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신타이베이시미술관(NTCAM)에서 만난 한 네프켄스. 글을 쓰는 작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네프켄스는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비디오 아트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있다. 신타이베이=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네프켄스재단은 2009년부터 전세계 60여개 미술관과 협업해 작품 제작 지원을 해왔는데, 이번 프로젝트는 유럽과 아시아 미술관을 아우르는 공모 프로그램이자 규모도 12만 달러(약 1억7000만 원)로 기존 10만 달러보다 더 커졌다. 각 미술관이 작가를 추천하면 심사를 거쳐 내년 초 선정 작가를 발표한다. 네프켄스는 심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나눔의 기쁨’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한 그는 “나는 ‘작품 수집가’보다는 ‘대화와 관계의 수집가’라는 말이 더 좋다”며 “큐레이터와 작가들이 나누는 대화와 선택을 통해 내가 몰랐을 작품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책 읽기와 공상을 좋아했던 저는 창문 밖으로 축구하며 뛰어노는 친구들을 구경만 하는 아이였어요. 시골 마을에서 나와 마음이 맞는 대화를 할 친구가 없다는 걸 느꼈지요. ”

어린시절부터 연결에 대한 갈망이 있던 그는 서른세살 때 HIV 양성 판정을 받고, 49세에 뇌염을 심각하게 앓았다. 먹고, 걷고, 말하고, 읽고, 쓰는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죽음의 위기’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했다.

“33세에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했죠. 거기서 물질적인 것은 절대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글쓰기, 그리고 예술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었어요.”

그가 만든 ‘연결 고리’를 통해 빌 비올라, 로니 혼, 펠릭스 토레스 곤잘레스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이 미술관에 기증됐다. 한국 작가 김희천, 안정주, 남화연 등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끼는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지금의 사회에서 가장 저평가된 가치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냄으로써 나는 이 세상의 일부가 됩니다. 일상에서 그보다 더 풍요로운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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