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망각의 세계에서 기억은 광증일 뿐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9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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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이승우 지음/240쪽·1만6000원·문학과지성사

가족의 비극적 죽음을 겪은 모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단편 ‘목소리들’). ‘자신을 탓하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고문이 멈추지 않을 걸 알기에’ 끊임없이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린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나약한 존재다.

작가가 2018년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8편을 묶은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요령이 없거나, 예민하고, 낯이 두껍지 못한 사람들이다. 부당한 대우를 겪고도 항의하지 못하거나, 마지막 통화를 거절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눈 딱 감고 그냥 넘어갈 줄은 모르는 이들이다.

단편 ‘공가(空家)’에선 폭력적인 소음이 이들을 괴롭힌다. 남편의 출장이 길어진 동안 시댁 식구들이 집에 눌러앉고, 급기야 노래방 기기까지 들여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자 ‘그녀’는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또 다른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부모에 의해 늘 귀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자 옛집을 찾아가지만 집은 재개발 지역의 공가가 돼 있다. 내몰린 두 사람이 들어서면서 빈집은 빈집이 아니게 된다.

주인공들은 ‘사랑마저 차별을 만들어 내는’ 역설적인 세계에 놓여 있다(단편 ‘마음의 부력’). 구약성서에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인 척하며 아버지가 내리는 장자의 축복을 훔쳐 가지만, 소설에서 동생은 본의 아니게 형을 소외시킨 처지가 괴로울 뿐이다. 죽은 형과 자신을 헷갈리는 어머니 앞에서 동생이 보이는 연기는 작은 구원의 신호일까. 그 역할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

부조리한 세계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 사실 망각 때문이다. 뺑소니 교통사고, 민간인 학살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잊고 사는 이들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미친 여자’가 될 뿐이다(단편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등단한 지 42년 된 작가의 묵직한 주제의식과 섬세한 문장이 펼친 책을 좀처럼 놓지 못하게 만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망각의 세계#기억#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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