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부캐는 무엇인가요” 세계 명품업계가 환호하는 청년 일러스트레이터의 열정[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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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기만의 길 개척해나가는 청년’ 김재석 패션일러스트레이터(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자신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수수걸을 그리고 있는 김재석 패션일러스트레이터. 그는 수수걸이 하나의 패션 캐릭터를 넘어 여러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는 트렌드세터로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수수걸을 그리고 있는 김재석 패션일러스트레이터. 그는 수수걸이 하나의 패션 캐릭터를 넘어 여러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는 트렌드세터로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맥퀸은 말했다. 제 옷을 입은 여성을 보세요. 제 옷에는 여성이 강해 보이도록 하는 어떤 강인함이 있어요. 그 강인함 덕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죠.”(을유문화사 평전 ‘현대 예술의 거장-알렉산더 맥퀸’에서)

패션업계 종사자들을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게 있다. 대체로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문득문득 예리한 칼날을 품은 기세가 배어난다. 언제든 전쟁터로 뛰어들 차비가 된 장수처럼.

지난달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재석 작가(36)도 그랬다. 세계적인 패션일러스트레이터답지 않은 소탈한 말투에다 차분한 미소도 보드라웠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눈빛이 서늘하면서도 강렬했다. 뭣보다 “타협하진 않되 문을 닫아두지도 않는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는 청년 아티스트의 패기 넘치는 신념도 묻어났다.

김 작가는 2010년 미국 뉴욕의 유명백화점 블루밍데일스와 협업을 시작으로 구찌 카르티에 불가리 피아제 등 수많은 브랜드와 작업해왔다. 이젠 그와 작업하지 않는 패션브랜드를 골라내기 힘들 정도다. 그가 작업마다 선보이는 캐릭터 ‘수수걸’은 어떤 매력을 지녔기에 이토록 많은 브랜드들이 앞다퉈 찾는 걸까.

-수수걸의 정체성은 뭔가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패션모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패션디자이너마다 선호하는 모델이 있듯, 제 의도를 가장 잘 실현해주는 캐릭터였던 거죠. 스트리트 패션부터 오뜨 꾸뛰르(맞춤제작의상)까지 소화하는. 그러다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며 소셜미디어에서 나름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됐고요. (※작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현재 약 26만 명에 이른다) 뭣보다 저의 또 다른 자아를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김재석 작가의 수수걸은 눈과 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김 작가는 수수걸이 눈코가 없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눈도 코도 없는 캐릭터를 왜 이렇게들 좋아할까요.

“보시는 분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 제가 그릴 땐 분명한 ‘의도’가 들어가 있어요. 모든 작품 속 수수걸은 다 각각의 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죠. 얼굴에서 드러나지 않는 기분이 자태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어요. 전 그게 훨씬 ‘패션스럽다’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어떤 느낌을 받느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자기만의 선(線)을 지니고 있지만, 항상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는 셈이죠.”

-동양적인 분위기가 짙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애초에 어떤 피부색이나 특정 문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는 아니지만, 제가 한국인이니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배어나긴 하겠죠. 그런데 그런 점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최근 워낙 세계적으로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잖아요.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들이 케이팝 뮤지션들을 서로 모셔가려고 하니까요. 아무래도 패션은 서구사회가 주류다 보니 과거엔 묘한 우월감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쪽에서도 우리를 ‘리스펙트(존중)’하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지금까지 함께 한 협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브랜드는 어딘가요.

“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는 계기가 된 블루밍데일스죠. 첫 문을 열어준 곳이기도 하고, 일도 참 깔끔하게 했죠. 좀 다른 이유로 화장품 브랜드인 ‘끌레드뽀 보떼’와의 협업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 로스앤젤레스 공항 면세점에서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행사를 했는데, 한 중국인 소녀가 찾아왔어요. 자긴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은 의사가 되라고 강요한다며. 제 작업을 보면서 다시 한번 꿈을 향해 도전하겠다는데 좀 뿌듯했어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열정이면 뭘 해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재석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신세계 백화점과 협업했던 ‘계절과 식탁’ 프로젝트. 과일 등 먹거리를 이용해 이채로운 패션 스타일을 선보였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과일이나 음식 재료로 만든 수수걸 드레스도 놀라웠어요.

“신세계와 협업한 캘린더 프로젝트였죠. 사실 꽃을 좋아해서 생화를 주로 쓰는데, 신세계는 백화점 브랜드니까 ‘계절과 식탁’이란 이미지를 만들기엔 그런 소재들이 유용하다고 봤어요. 뭔가를 표현할 때 주제가 중요하지, 작업 방식이나 형식엔 구애받지 않는 편이에요. 직접 손으로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디지털 작업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때도 있거든요. 요즘은 개인적으로 세라믹(자기)에 관심이 많아서, 이를 통해서 수수걸을 형상화하기도 해요. 아직 준비 단계지만, 조만간 개인전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게 여기는 가치는 뭘까요.

“음…, 딱 한 가지를 고르기는 무척 어렵네요. 일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어야겠죠. 아까 수수걸이 눈코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활동 초기에 수수걸의 생김새를 바꾸길 요청하는 업체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그게 수수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본질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걸 이해해주시는 회사와만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이건 커머셜한(상업적인) 협업이기도 하잖아요. 때문에 커뮤니케이션도 무척 중요합니다. 제 고집만 피우지 않고 의견을 잘 청취하고, 또 제 생각을 긍정적으로 잘 전달해야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다양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지 궁금하네요.

“트렌드를 읽어내는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단순히 패션 유행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일러스트레이터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각광받던 소셜미디어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어, 지금 유튜브가 유행이라면 그걸 즐기는데 그치지 말아야 해요. 이걸 이용해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죠. 무조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란 얘기는 아니에요. 자신이 가진 걸 어떻게 새로운 방식과 결합시켜서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김재석 작가가 자기로 만든 수수걸. 김 작가는 수수걸을 활용한 상업적인 프로젝트 외에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담은 개인전도 준비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한국의 경직된 사회문화가 그런 창의성을 가로막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 같아요. 분명히 사회적 분위기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젊은 사람들이 회사 관두고 창업하겠다고 하면 다 말리는 분위기잖아요. 외국에선 오히려 해보라고 응원하는 분위기인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면 한발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뭐든 해봐야 결과도 나오는 거니까요. 다만 그 도전이 뭘 위한 것인지는 잘 판단해야 할 거 같아요. 회사생활 힘드니까 관두고 싶다 같은 것이어선 안 돼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준비 없는 도전은 용기가 아니라 무책임한 거죠. 그런 면에서 사회적 분위기만 탓해서도 안 된다고 봐요.”

-작가님이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요.

“돈이죠, 돈. 하하. 농담입니다. 물론 프리랜서로 나설 땐 어느 정도 수익 창출이 가능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요.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지만, 꾸준하게 노력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꾸준함이에요. 왜 공부도 계속하는 사람이 결국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세상에 하는 것마다 성공하는 천재가 몇이나 되겠어요. 천재도 그렇게 운이 따르진 않을 거 같아요. 저도 가방 사업을 포함해 실패한 게 많죠. 하지만 그걸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봐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가 되든 계속해봐야죠.”

-앞으로 수수걸 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요.

“글쎄요. 앞일은 정해진 게 없으니까요. 다만 최근엔 파크 하얏트 같은 호텔이나 롤스로이스 같은 자동차, 삼성전자 등 패션 이외의 브랜드와도 협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제는 패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트렌드 세터(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로 자리 잡은 거죠. 아, 조만간 수수걸의 남자친구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수수보이쯤 되겠죠? 그간 팬데믹 탓에 해외에 많이 나가질 못했는데, 다시 저와 함께 세상 곳곳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김재석 패션 일러스트레이터가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 롤스로이스와 협업한 작품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김 작가를 만난 뒤 ‘부캐(부 캐릭터)’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사실 부캐란 말이 아니어도 사람은 원래 여러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성격유형검사)도 할 때마다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듯, 우린 굳이 ‘부(副)’를 붙이지만 실상은 어느 게 본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허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게 본캐이든 부캐이든, 자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 끈기 있게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김 작가는 “패션광고회사에 다닐 때 기술적으로 실력 있는 작가들을 여럿 봤는데,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는 많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물론 그게 줏대가 될지 아집이 될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마저 소중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 귀하게 여겨줄까. 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꾸는 것이다. 그걸 깨달아야 비로소 꿈을 향한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나의 옛날 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김재석 작가가 고른 두 번째 사진은 유치원 시절 그림을 그리는 앙증맞은 모습입니다. 무작정그리는 게 좋았던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평생 놓지 않고 함께 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나 봅니다. 사진제공 김재석 작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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