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도축하던 성균관 공노비 ‘반인’들, 스스로 글 배웠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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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교수, ‘노비와 쇠고기’ 출간
“조정에선 영업세 받고 도축 허가
전쟁후 반인 수탈, 나라곳간 채워”


조선은 ‘쇠고기의 나라’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1년 동안 도축되는 소가 약 39만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은 소를 팔아 도축한 자는 장(杖) 100대를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강력한 ‘우금(牛禁)’ 법을 가진 사회였다. 법을 어기고 소를 도축했던 대표적 집단으로 ‘반인(泮人)’이 있었다. 반인은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인근 반촌(泮村)에 살던 성균관의 공노비다. 17세기 쇠고기 도축이 급증하자 조정은 반인에게 영업세로 속전(贖錢)을 받는 대신 소고기를 도축하는 ‘현방(懸房)’을 허가해줬다.


신간 ‘노비와 쇠고기’(푸른역사)를 통해 반인에 주목한 강명관 전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65·사진)를 서울 은평구 자택 인근 카페에서 3일 만났다. 강 전 교수는 “우금 법은 18세기부터 사문화됐지만 반인에겐 늘 ‘불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며 “조선을 지탱한 이들이 어떻게 지배당하면서 저항했는지가 궁금했다”고 했다.

강 전 교수는 2003년부터 20년 동안 승정원일기뿐 아니라 반인에게 속전을 받았던 삼법사(三法司, 형조·사헌부·한성부를 통칭) 사료에서 현방과 관련된 기록들을 이 잡듯이 긁어모았다. 책은 주석만 140쪽에 이른다. 사료 속에서 지배계급에 수탈당했던 반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건져낸 강 전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재정난이 극심해지자 성균관과 삼법사는 현방을 수탈하며 곳간을 채웠다”고 했다.

1747년 성균관 대사성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당시 현방 총 21곳이 1년에 삼법사 속전으로 7000냥, 성균관 운영 자금으로 8000냥을 냈다. 초가집 150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18세기 초에는 조정에 ‘탈탈 털린’ 반인들이 진 빚이 5만 냥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먹을거리가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반인도 나왔다. 강 전 교수는 “상소문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죽음”이라고 했다.

책에는 수탈에 저항한 반인의 목소리도 함께 담겼다. 반인들은 횡포에 맞서 현방 문을 닫거나(撤屠·철도), 성균관 식당에 식사 제공 노역을 거부(闕供·궐공)하기도 했다. 강 전 교수는 “노비의 관점에서 사료를 다시 읽으면 수탈에 저항하려 했던 반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이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건 인간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진실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배계층으로부터 외면당한 반인들이었지만 스스로 살길을 도모했다. 성균관 유생에게 밥을 지어주거나 거처를 내주면서 수익을 냈고, 장빙(藏氷·얼음을 저장하는 곳간) 사업도 함께 벌였다. 반촌에 ‘제업문회’라는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다.

“갖은 수탈을 당하면서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노래를 부르고 글을 짓는 인간이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저항했고 같이 살 길을 찾았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조선의 주체였던 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반인 수탈#노비와 쇠고기#강명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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