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초기 교과서 ‘여자독본’, 여학생 저항의식 고취”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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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 장지연이 1908년 발간
격변기 주체적 역할한 여성 다뤄
학계 “3·1운동 등 항일투쟁에 영향”

1908년 위암 장지연 선생이 발간한 여자 교과서 ‘여자독본’ 하권. 박시언 연구원 제공
1908년 위암 장지연 선생이 발간한 여자 교과서 ‘여자독본’ 하권. 박시언 연구원 제공
“사로탈(샤를로트 코르데)은 글 읽기를 좋아하여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았다.…마침내 법국(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니…세력가 마랍(장 폴 마라)이 있어 전국의 대권을 잡고 백성에게 포학한 정치를 펴 백성의 상함이 한정 없었다. 사로탈이 홀연히 전국의 백성을 구원할 것을 생각하였다.…사로탈은 곧 마랍의 곁에 이르러 능릉한 칼날로 그의 가슴을 꿰었다.”

“백 년 전에 미주에서 흑인 노예를 매매하여 부렸다.…비다 여사(해리엇 비처 스토)가…천고에 없어지지 아니할 의론을 세워 수만 명 흑인 노예의 구세주가 되었다.”

근대 초기 여성용 교과서 ‘여자독본’(1908년 발간)에 실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지롱드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와 미국 소설가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에 대한 내용이다. 우국지사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이 낸 이 책은 한국과 중국, 서양의 여성 83명을 열전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여성 교육은 ‘현모양처’에 초점을 뒀다는 인식이 많지만 ‘여자독본’에는 전쟁, 혁명 등 역사적 격변기에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들 모습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박시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은 11일 학술대회 ‘동아시아 권력과 시각표상’에서 발표한 ‘근대 전환기 비일상(非日常) 표상과 여성 교육’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여자독본에는 군사를 진두지휘하거나 총과 칼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 인물이 잔 다르크(1412∼1431)를 비롯해 7명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기 여성 영웅 롤랑 부인(1754∼1793) 등이 도전적인 혁명가의 모습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장관이 된 임영신 씨. 동아일보DB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장관이 된 임영신 씨. 동아일보DB
박 연구원은 이러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중에 1919년 3·1운동의 주축이 됐다고 봤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주 지역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기전여학교다. 학교에서 여자독본을 통해 동서양 여성들의 저항의식과 투쟁을 접한 이 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준비와 진행까지 전 과정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학교 졸업 후 소학교 교사로 일하던 임영신 씨(1899∼1977)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박 연구원은 “여자독본에는 체제에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여성,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활약하는 여성 등이 다양하게 제시된다”며 “유교주의를 넘어 주체적 여성의 삶을 꿈꾸게 하는 재료가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여성용 교과서인 ‘부녀감’(1887년)이 발간됐지만 ‘여자독본’과는 차이점이 적지 않다. 일본 메이지 천황의 부인인 쇼켄(昭憲) 황후(1849∼1914)의 지시로 발간된 이 책은 여성을 복수나 저항의 주체로 그리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부상병을 간호하고 군복을 만드는 등 후방을 방어하는 모습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벌였던 일본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 국경과 민족, 인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연대나 자유로운 지리적 이동을 보여준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여자독본#근대초기#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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