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 산티아고, 그 반대 방향에는 무엇이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7일 09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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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개막한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2일 개막한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예수의 제자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알려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년 18만 명이 찾는다. 800km가 넘는 길을 걸으면 순례의 끝,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성당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을 만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산티아고의 반대방향, 극동 시베리아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무엇을 원하고 믿는 사람일까. 천국과 구원이 아닌 그 반대의 것을 염원하는 건 아닐까.

2~27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거꾸로 향하는 순례자에 관한 이야기다. 극동 시베리아로 순례를 떠난 ‘그’(전선우)와 ‘그’를 관찰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극은 주로 오호츠크 해상의 기후탐사선에 타고 있는 기후연구원 AA(이은정)와 BB(정슬기)가 ‘그’의 발자취를 좇으며 대화를 나눈 방식으로 진행된다.

배경은 2020년으로부터 얼마가 지난 그 이후다. 인공지능(AI), 멀티버스 등의 기술이 고도화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마구 뒤섞여 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순례도 온라인으로 한다. 다들 온라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하는 와중에 홀로 극동 시베리아로 ‘직접’ 순례를 떠나는 ‘그’가 등장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의 행방을 두고 온갖 의견, 추측, 생각을 쏟아낸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그’에게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반드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실존을 추구하는 AA와 가상을 받아들인 BB가 크고 작은 주제에 관해 논쟁을 벌인다.

산티아고가 아닌 극동 시베리아로 순례길을 떠난 ‘그’를 관찰하는 두 기후연구원의 모습. 국립극단 제공
산티아고가 아닌 극동 시베리아로 순례길을 떠난 ‘그’를 관찰하는 두 기후연구원의 모습. 국립극단 제공

실존과 가상이 뒤섞인 미래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지라 극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혼란 그 자체다. 기승전결을 갖춘 촘촘한 서사를 구축하기 보다는 작가의 여러 생각이 두 사람의 대화에 심긴 방식이다. 하지만 극동 시베리아로 향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진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순례의 끝에서 ‘그’가 맞게 될 어떤 결말을 상상하게 된다. 희곡을 쓰고 연출한 정진새는 “팬데믹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뒤섞인 혼란의 시대를 기록하는 차원으로 쓴 작품”이라고 했다.

작품은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원형을 닮았다. 미지의 누군가를 기다리는(혹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2인극이라는 점에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세계에서 난민처럼 버려진 이들의 상실을 그렸다면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팬데믹과 기후위기 같은 전 지구적 재난을 겪는 인류의 혼란을 담았다. 재난 속에서 세계는 점멸하게 돼있다. 이를 은유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로 90분가량의 연극에서 암전은 50회 이상 이뤄진다. 정 연출은 “암전은 점점 흐릿해지고 희미해져가는 세상, 모호하고 어렴풋하며 선명하지 않은 세계를 증언하려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에서 기후연구원 BB를 연기하는 배우 정슬기. 국립극단 제공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에서 기후연구원 BB를 연기하는 배우 정슬기. 국립극단 제공

극동 시베리아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정체는 점점 드러난다. 혼란과 상실, 고립의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정 연출은 “휴머니즘의 긍정이나 재확인,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극을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며 “이렇게 되어버린 지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석 3만5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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