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단편영화상 후보 유명… 에릭 오 감독 신작 애니 ‘오리진’
서울 스페이스K서 파사드 상영
스토리도 불분명한 5분 영상
“관객들이 회화 보듯 느끼면 되죠”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외벽에서 상영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오리진’. 에릭 오는 “아티스트의 색깔을 담기에는 단편이 가장 적절하다”며 “이런 작업을 통해 생각을 예술적이고 회화적으로 풀고 싶다”고 했다. 스페이스K 제공
“회화 같은 순수예술도 해봤고, 픽사에서 상업영화도 경험해 봤죠. 이렇게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며 노는 게 재밌습니다. 작가나 감독 같은 호칭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네요. 그냥 ‘스토리텔러’라고 불러주세요.”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어둑해질 무렵. 서울 강서구에 있는 미술관 ‘스페이스K’ 외벽에선 뭔지 모를 동영상 하나가 상영됐다.
높이가 11m인 벽에선 유리를 깨고 나온 동그란 물체 사이로 작은 멍 자국 같은 것들이 피어난다. 그리고 눈물처럼 흐르다가 굳어버리는 검은색 액체. 그 속에서 갑작스레 빛이 퍼지며 꽃과 같은 형상이 깨어난다. 섬뜩했다가 아름다웠다가. 가만히 마주하다 보면 문득 세상 모든 게 덧없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에릭 오몽환적인 반복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작품은 애니메이터이자 미디어아트 작가인 에릭 오(38)의 신작 애니메이션 ‘오리진(Origin)’.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오 작가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미국 ‘픽사’에서 7년간 활동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몬스터 대학교’(2013년) ‘인사이드 아웃’(2015년) ‘도리를 찾아서’(2016년) 등에 제작진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세상에 에릭 오란 이름을 제대로 각인시킨 건 “나만의 작업을 하고 싶어서” 픽사에서 나온 뒤 4년 동안 공들인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를 통해서였다. 독특한 피라미드 모형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묘사한 작품은 지난해 미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오 작가에 따르면 ‘오리진’은 오페라의 “프리퀄 연작”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사실 둘 다 2016년에 함께 구상했던 작품”이라며 “오페라가 역사화라면, 오리진은 추상화에 가깝다”고 말했다.
“두 작품은 같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나’ 하는 거죠. 오페라가 인류사에 대한 탐구라면, 오리진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이란 주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삶의 흐름을 생각하면 원이란 이미지가 떠올라요. 그게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랄까요.”
작가의 말처럼 원을 닮아서인지 오리진은 딱히 ‘전형성’이란 게 없다. 캐릭터도 스토리도 분명하지 않으며, 영상도 그리 길지 않다. 오리진은 5분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시작과 끝이 애매모호하다. 오 작가는 이를 “회화적”이라고 설명했다.
“하나의 그림을 감상한다고 떠올려 보세요. 감상 시간은 1초가 될 수도 있고, 2시간이 넘어도 상관없잖아요. 영화는 감독의 의도대로 화면을 구상하지만 제 작품은 ‘회화로서’ 관객에게 자유를 줍니다. 무수히 많은 뭔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관객이 생각과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느끼고 얻는 게 모두 달라지는 거죠.”
신작을 영화관이 아니라 미술관 외벽에서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상영한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관람할 것이고, 아니면 무심코 곁눈질하며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미술관 주변을 산책하는 시민들과 예술의 접점을 늘리자는 의도로 기획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며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선보일 기회”라고 밝혔다.
오 작가는 앞으로도 이런 ‘경계 없는’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올해 10월 그가 연출로 참여한 4부작 애니메이션 ‘오니: 천둥 신의 전설’이 넷플릭스에서 선보인다.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장편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스토리텔러’의 활동 반경은 멈추지 않고 갈수록 커지고 있다.
8월 24일부터 시작된 전시는 12월 2일까지 이어진다. 매일 오후 7시 반부터 11시까지 반복 상영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