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라’ 대신 ‘싸우자’ 외친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 타계[동아플래시100]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2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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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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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병세는 이상하게 변하야 실진(失眞)이 되는 동시에 상해 엇더한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라는데….’ 실진(失眞)은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인용한 구절은 1925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들어 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精神異狀(정신이상)을 傳(전)하는 上海(상해)의 盧伯麟(노백린) 氏(씨)’였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군무총장을 지낸 계원(桂園) 노백린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문병 간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울다가 웃다가 한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타계했습니다. 가슴에 품은 독립전쟁의 원대한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남의 나라에서 오십 평생을 마감했죠.

①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군복 정장 차림 모습. 촬영 시점은 알 수 없다. ②노백린의 묘가 있던 중국 송경령능원 외국인 묘지의 비석 ③노백린이 처음 안장됐던 중국 상하이 정안사 외국인 묘지 비석. 로파린은 노백린의 중국어 발음이다. 노백린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봉환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군복 정장 차림 모습. 촬영 시점은 알 수 없다. 노백린의 묘가 있던 중국 송경령능원 외국인 묘지의 비석 노백린이 처음 안장됐던 중국 상하이 정안사 외국인 묘지 비석. 로파린은 노백린의 중국어 발음이다. 노백린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봉환됐다.


1875년 황해도 풍천에서 태어난 노백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부친은 큰 인물이 되라며 이름 진방(鎭邦)을 맏기린의 뜻인 백린(伯麟)으로 고쳤죠.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 4년 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해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20세 때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황해도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뽑혔죠. 3년의 준비과정 끝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유학생 생활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쪼들렸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힘을 잃자 학비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노백린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일본 육사 제11기 졸업생이 됐습니다.

①1907년 군대해산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해주를 지나던 침통한 표정의 노백린. ②노백린이 남긴 한문 서찰. 노백린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기 시작해 4년 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했다고 한다. 훗날 남긴 한시나 한문 서찰 등은 어렸을 때 그가 얼마나 한학 공부에 매진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07년 군대해산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해주를 지나던 침통한 표정의 노백린. 노백린이 남긴 한문 서찰. 노백린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기 시작해 4년 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했다고 한다. 훗날 남긴 한시나 한문 서찰 등은 어렸을 때 그가 얼마나 한학 공부에 매진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군인으로 거듭난 노백린은 1901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이 됐습니다. ‘호랑이 교관’으로 유명했다죠. 기숙사 야간순찰 중 ‘노백린을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었죠. 모두 숨느라 정신이 없는 통에 한 학생이 나서서 허리춤의 칼을 뽑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노백린을 이렇게 죽였으면 좋겠다고 했소’라고 대꾸했습니다. 노백린은 껄껄 웃으면서 ‘네가 사나이로구나’라며 숨었던 학생들만 혼냈다고 합니다. 그는 대식가였습니다. 교관 시절 요릿집에 혼자 가서 6, 7인분을 주문했답니다. 종업원은 손님이 다 오면 음식을 들여가려고 했지만 빨리 내오라는 노백린의 꾸중만 들었죠. 혼자서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어치웠던 겁니다.

①노백린(가운데)이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세운 비행기학교에서 교관들과 함께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②미국 하와이에서 중국 상하이로 떠나기 전 함께 만난 임시대통령 이승만(왼쪽)과 군무총장 노백린.
노백린(가운데)이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세운 비행기학교에서 교관들과 함께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미국 하와이에서 중국 상하이로 떠나기 전 함께 만난 임시대통령 이승만(왼쪽)과 군무총장 노백린.

노백린은 1907년 육군무관학교 교장이 됐지만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군대해산의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항의 자결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 대장 박성환은 훗날 그의 사돈이 됐죠. 그 역시 자결하려 했지만 부하들이 말려 실패했습니다. 시가전을 치르던 젊은 병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냐, 지금은 할 수 없다. 어디 두고 보자’며 눈물을 삼켰죠. 군을 떠난 그는 고향에 광무학당을 세우기도 하고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 앞장섰죠. 교장 시절에는 추우나 더우나 도수군사훈련을 실시해 결국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개혁당 신민회 서우학회 등에 가입해 항일민족운동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피혁회사를 설립하고 금광에도 손을 댔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죠.

①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군인으로 지원하라고 권유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 ②전 국무총리 노백린의 장례식이 거행됐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6년 2월 8일자 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군인으로 지원하라고 권유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 전 국무총리 노백린의 장례식이 거행됐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6년 2월 8일자 기사.


결국 노백린은 1916년 중국 상하이를 거쳐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박용만과 의기투합해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창설했죠.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추대됐지만 바로 합류하지 않고 캘리포니아 윌로스에서 호국독립군단과 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기학교를 세웠습니다. 부자 농장주 김종림의 지원 덕분이었죠. 장차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1921년 상하이 환영식에서 노백린은 군가 가사 중 ‘나가라, 싸우라’를 ‘나가자, 싸우자’로 고쳐 불렀죠. 같이 싸우자는 뜻이었죠. 1922년부터 2년 간 국무총리로 분열 속에 쓰러져 가는 임시정부를 겨우겨우 지탱했습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상했는지 그는 끝내 쓰러졌죠. 인력거꾼이 먹는 황포반으로 간신히 끼니를 잇던 생활고도 작용했을 겁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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