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할 권리 없냐?” 퍼부어도… “죄송합니다”만 할뿐 전화 끊을 수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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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상담원 애환담은 에세이 ‘믿을수 없게 시끄럽고…’ 펴낸 30대 여성
콜센터, 고객만족 점수로 급여책정… 먼저 전화 끊으면 낮은점수 불보듯
“평민” “아줌마” 불러도 참고 기다려… 신입, 한달내 절반이상 그만두지만
생계 때문에 돌아오는 이들도 많아, 우리도 사람… 조금 더 친절해 주길

“욕 안 들을 권리가 있다고? 고객은 콜센터 상담원에게 욕할 권리가 없냐?”

한 콜센터 상담원은 수화기 너머 이런 항의를 받았다. 고객은 처음엔 자신이 구매한 상품의 환불을 요청하며 상담원을 ‘상담원님’이라고 호칭했다. 하지만 규정상 환불 기한이 지난 상품이라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상담원이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자 고객은 “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객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던 상담원은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일 출간된 에세이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코난북스)에 담긴 사연이다.

책을 쓴 30대 여성 상담원 A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감정노동을 겪는 게 상담사의 운명이라지만 갈수록 고객이 상담사를 화풀이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상담원을 남에게 욕을 먹는 ‘욕받이’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대학생이던 2010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상담원 일을 11년간 하고 있는 A 씨는 “그간 다양한 고객들을 만났다. 지금도 상담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저와 동료 상담원들의 실명은 밝힐 수 없지만 상담원들의 애환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고객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제품을 산 뒤 얼마 후 같은 제품을 1만 원 낮은 가격에 파는 것을 발견했다. 상담원에게 전화를 걸어 “기분 나쁘다. 적립금 3만 원을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다른 고객은 음식물을 씹으면서 말을 했다. 상담원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식사를 마친 후에 얘기해 달라고 하자 “내가 말하는 게 더러워?”라고 벌컥 화를 냈다.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네가 그러니까 콜센터 같은 데서 일하지”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상담원을 “평민들” “아줌마”라고 부르는 고객도 있다.

콜센터는 응답 건수, 고객만족도를 바탕으로 상담원마다 점수를 매기고 급여를 책정한다. 욕설을 들은 상담원이 전화를 먼저 끊으면 고객들은 상담원의 점수를 낮게 줄 수 있다. 고객의 욕설이 쏟아져도 상담원이 쉽사리 전화를 끊을 수 없는 이유다. A 씨는 “의도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진상 고객’의 무례를 참는 게 가장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화를 먼저 끊는 건 죄”라며 “점점 건성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자신을 보면 슬프다”고 했다.

상담원은 하루에 수십 명의 고객을 응대한다. 신입 상담원은 감정노동에 지쳐 취업 후 한 달 이내에 절반 이상이 그만둔다는 게 A 씨의 설명. 물론 생계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A 씨는 “콜센터 상담원 절반 이상이 20, 30대 여성이다. 대부분이 무일푼에 학자금 대출 같은 빚을 진 상태”라며 “욕설에 지쳐 일을 그만뒀다가도 아이까지 낳은 ‘경단녀’(경력단절여성)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콜센터로 돌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A 씨가 일하는 콜센터는 최근 채용 경쟁률이 3 대 1까지 치솟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일자리를 찾기 힘든 이들이 신입 상담원으로 몰린 것. “멀쩡히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상담원이 된 분들도 많아요.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오늘은 상담원이 됐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화기 너머에 있는 건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에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콜센터 상담원#감정노동#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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