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웹툰, 애니로 만들어주세요” 디즈니-망가의 나라도 반했다

김재희기자 입력 2021-01-31 15:39수정 2021-01-3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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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웹툰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국 온라인 청원사이트 ‘체인지 닷 오알지’(change.org)에 올라온 한 청원이다. 해당 청원에는 31일 기준 총 17만9000여 명이 동의했다. ‘디즈니의 나라’ 미국에서 18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애니메이션화를 요구하고 있는 웹툰은 다름 아닌 한국 콘텐츠 기업 ‘DMC미디어’가 제작한 ‘나 혼자만 레벨업’이다. 몬스터를 잡는 헌터 ‘성진우’가 ‘퀘스트’(게임에서 유저가 실행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레벨이 상승하고, 약체에서 최강 전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이 웹툰이 영미권 웹툰 플랫폼에서 서비스되면서 해당 웹툰을 접한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제작을 요청하고 있는 것. 미국뿐만 아니라 만화 강국인 일본과 유럽에서도 반응은 뜨겁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카카오재팬 만화 플랫폼 ‘픽코마’에서 서비스된 이후 하루 최대 100만 명이 봤고, 브라질과 독일에서는 단행본 출간 첫 주에 아마존 만화책 부문 판매 1위에 올랐다. 해외에서의 선풍적인 반응에 힘입어 DMC미디어는 나 혼자만 레벨 업 웹툰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추진 중이다.



네이버도 웹툰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신의 탑’과 ‘갓 오브 하이스쿨’ ‘노블레스’ 세 편을 연이어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해 선보였다. 세 작품은 각각 국내외 누적 조회수 45억 회, 38억 회, 46억 회를 기록한 네이버웹툰의 ‘슈퍼 지식재산권(IP)’이다. 세 작품 모두 네이버의 동영상 플랫폼인 ‘시리즈온’을 통해 국내 방영됐고, 미국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플랫폼 ‘크런치롤’을 통해 미국과 남미, 유럽지역에서 서비스됐다. 네이버는 올해도 ‘유미의 세포들’ ‘연의 편지’ ‘나노리스트’ 세 편의 웹툰을 애니메이션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제작을 진행 중이다. 유미의 세포들과 연의 편지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나노리스트는 해외 플랫폼을 타깃으로 한 시리즈물로 내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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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웹툰 등에 업고 ‘뽀로로’ 넘는 K 애니
그동안 국내 애니메이션은 타깃 연령층이 영·유아로 한정돼 있고, 완구로 수익을 내는 사업 모델이 수십 년 간 지속됐다. 자연히 장르가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같은 영·유아 타깃의 교육물이나 로봇메카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K 웹툰’의 인기는 이런 애니메이션계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기존에는 웹툰 IP를 영화나 드라마로 실사화하는 게 대세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애니메이션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 시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K 애니메이션의 사업성이 커지면서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드라마부터 로맨스 판타지, 액션, 무협 등 다양한 장르의 웹툰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타깃 연령층과 장르의 한계가 깨질 거란 기대감이 나온다.

웹툰이 애니메이션화의 바람을 탄 건 K 웹툰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다. 웹툰 원작의 팬층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대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시장이 큰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 한국 웹툰이 인기를 끌자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애니메이션도 해외에서 흥행을 노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희윤 네이버웹툰 IP비즈니스팀 리더는 “원작 팬은 만화에서 받은 느낌을 애니메이션에서 그대로 느끼길 바라기 때문에 웹툰을 얼마나 똑같이 재현했느냐가 애니메이션화 성공의 관건이다. 제대로 재현해냈을 경우 웹툰 원작 팬이 곧 리메이크 애니메이션 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팬층 유입 효과가 크다”고 했다. 이어 “원작 그림체를 잘 살린 신의 탑과 갓 오브 하이스쿨, 노블레스도 원작 팬 유입효과가 있었다. 세 애니메이션 모두 원작 웹툰 구독자 주 연령대인 10대 후반, 20~30대가 가장 많이 시청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개봉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기기괴괴 성형수’도 원작 웹툰의 해외 인기가 실제 흥행으로도 이어진 사례다. 원작은 오성대 작가의 옴니버스 웹툰 ‘기기괴괴’ 중 ‘성형수편’이다. 기기괴괴는 중국, 대만, 홍콩 등 중화권에서 2015년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해외 시장에서의 흥행 가능성을 본 에스에스애니먼트가 2차 저작권을 확보해 애니메이션 제작을 추진했다. 9월 대만 개봉 당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했다. 올해 일본에서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일본, 미국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해외 시장의 편견을 뛰어넘는데 있어서도 K 웹툰의 인지도가 도움이 된다. 기기괴괴 성형수 연출을 담당한 에스에스애니먼트의 전병진 PD는 “한국 애니메이션은 해외에서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한국 개봉 전에 수입배급사가 시나리오와 감독, 제작사 등을 보고 작품을 사가는 ‘프리바이’가 거의 없다. 통상 한국에서 개봉한 뒤 관객 수, 반응 등을 본 뒤 수입배급을 결정한다”면서 “그런데 기기괴괴 성형수는 원작 IP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덕분에 굉장히 드물게 대만, 홍콩, 일본 등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프리바이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웹툰을 가장 원작과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장르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점도 웹툰의 애니메이션화를 촉진하는 요소다. 웹툰을 실사화할 경우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도 원작 캐릭터만이 갖는 고유한 매력을 그대로 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물이나 아포칼립스물은 실사화가 까다롭다는 장벽도 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에 비해 웹툰 안의 세계관을 더 쉽게 구현할 수 있기에 ‘높은 싱크로율’을 첫 번째 기준으로 삼는 원작 팬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하다.



이희윤 리더는 “각 웹툰 IP마다 최적화된 장르가 존재한다. 명확한 기승전결이 있고 실사화하기에 부담이 없는 설정인지가 영화나 드라마화의 중요한 기준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의 ‘엣지’(edge), 즉 그 캐릭터만이 갖는 매력이 가장 중요하다. 캐릭터 설정 하나하나가 매력적인 노블리스나 갓 오브 하이스쿨이 애니메이션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유미의 세포들 역시 주인공 유미가 왜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유미 머릿속의 세포들의 관점에서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100% 살릴 수 있는 최적화된 장르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다.

●IP는 앞서가지만 인력난이 문제
현재 K 웹툰을 둘러보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때 대박이 날 수 있는 ‘슈퍼 IP’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애니메이션은 수익성이 낮다는 인식 때문에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네이버처럼 자체 투자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콘텐츠 공룡’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형 제작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인기 IP의 2차 저작권을 확보해도 투자가 막혀 제작이 지연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기기괴괴 성형수 역시 투자처를 찾지 못해 2015년 3월 저작권 계약을 하고 5년이 지나서야 개봉을 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달고나엔터테인먼트의 김광회 부대표는 “제작 기간은 길어야 2년 정도다.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주기가 감독 또는 제작사마다 5~10년에 달하는 이유는 제작비를 투자 받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시간이 지연됐기 때문”이라며 “220만 관객을 모아 극장 개봉 한국 애니메이션 1위를 달성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조차 차기작 ‘언더독’이 개봉하기까지 투자 문제로 7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투자를 받지 못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보장된 영·유아 타깃의 애니메이션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성인 타깃의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 배출되는 길이 막히는 것이다. 시장이 좁으니 돈이 돌지 않고, 노하우를 전수할 인력도 양성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웹툰·웹소설 업체 부장은 “국내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술이 해외에 비해 낮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국내 제작사 대부분 아동 애니메이션에 치중해 있기 때문에 성인 타깃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연출할 역량을 갖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라며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귀멸의 칼날’ 수준의 3D 드로잉과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한국도 충분히 갖췄지만 귀멸의 칼날과 같은 기획과 연출을 할 수 있는 제작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지난해 10월 일본 개봉 후 2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아 일본 극장 흥행 수입 1위를 달성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개봉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현장에서는 K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키우려면 관련 인력의 역량을 키울 실효성 있는 지원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인기 있는 원천 IP를 제대로 살릴 만한 기획력과 연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 지금처럼 제작비 일부를 주는 형식적 지원을 뛰어넘어서 기획과 시나리오, 스토리보드를 짜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편집, 더빙 등의 포스트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애니메이션 제작 전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병진 PD는 “현재 정부 등의 지원책은 제작비 일부 지원 형식이다. 정부 지원을 받더라도 창업투자회사 등의 추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 있는 공공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설립을 통해 노하우를 쌓은 인력을 배출하는데 힘써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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