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감성 연애시의 원조’ 원태연 시인, 18년 만에 귀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2일 15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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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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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지나왔거나 누군가를 짝사랑해본 사람이라면 원태연 시인(49)을 모를 수 없다. ‘넌 가끔 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니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로 대표되는 ‘연애시’ 신드롬을 불렀던 주인공이다. 절절한 가슴앓이를 담아낸 원태연의 시는 숱한 아류작을 양산했다.

그가 18년 만에 대표작 70편과 신작시 30편을 더한 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들고 독자들 곁으로 돌아왔다. ‘국내 시집 판매 1위’를 기록한 밀리언셀러 시인이 된 이후 출판계를 완전히 떠나 작사가, 영화감독, 연예기획사 프로듀서 등으로 변신해 활동하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것.

그는 “작년에 10년 다닌 회사에서 해고당했고 올해 오랜 꿈이었던 드라마 제작(극본작업)이 엎어지며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돌파구가 절실하던 무렵 필사 시집을 내보자했던 출판사 제안이 떠올랐다. 완전히 잊어버린 시 쓰기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다.

원태연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시집은 중학생 때부터 7년간 쓴 시를 묶은 것이었다. 다들 “넌 매일 뭘 그렇게 쓰니” 물었다. 아무런 필터링 없이 거침없이 쓴 시를 묶어 낸 것이 첫 시집 ‘넌 가끔…’이었다. 이름도 없던 작은 출판사에서 인세 대신 매절계약으로 냈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 150만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정작 그의 손에 들어온 인세는 전무했다. 두 번째 시집 ‘손끝으로…’로 대학생 치고 큰 돈을 벌었지만, 그 이후 낸 시집들 역시 출판사 대표의 야반도주 등으로 인세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의 시집들은 총 600만부가 팔렸다고 추산될 뿐 아직도 정확히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른다. 그는 “결과적으론 잘된 거다. 돈까지 있었으면 큰일 났을 것 같다”며 웃었다.

사격선수 출신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한 ‘상남자’였던 그가 애틋한 연애시의 시인으로 유명해지자 가장 놀란 건 가족들이었다. 새벽에 출판사에서 받은 증정본을 신발장에 올려놓고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다급히 묻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봐. 이거 누가 써 주는 거야?”

백지영 ‘그 여자’, 허각 ‘나를 잊지 말아요’ 등 애절한 발라드 노랫말을 쓴 유명 작사가이기도 한 그는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낯간지러울 정도로의 절절한 표현이 백미다. 그는 “그런 자아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작사할 때 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깜짝 놀란다”고 했다. ‘그 여자’의 일부(“한 여자가 그대를 사랑합니다…매일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다니며 그 여자는 웃으며 울고 있어요”)를 예로 들며 설명하다가 갑자기 소매를 손끝까지 끌어내리기도 했다.

“추워지네요. 미쳤죠. 오글거려서 오싹해질 지경이에요.”

그는 가장 많이 읽힌 시를 썼음에도 문단에서는 외면 받았다. 출판계에서도 시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정작 “작사는 20년을 넘게 했는데도 여전히 ‘시인이라서 이렇게 쓴다’는 소릴 듣는 게 아이러니”다.

개그프로에선 그의 시가 패러디 단골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18년 만에 다시 시를 쓰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고민이 컸다. 사실 시 쓰는 걸 관둔 것도 대중이 원하는 ‘원태연 표’ 시라는 얘기가 듣기 싫어서였다. “사격을 시작하고 1년 만에 전국대회 2등을 했었는데 다들 ‘우연’이라고 하더라. 나 역시 성공해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그렇게 여겼고 그 뒤로는 정말 메달이 없었다”며 “첫 시집이 잘되니 따들 또 그랬다. 그냥 ‘우연’이라고. 더 이상 사회에 지기 싫단 오기로 두 번째 시집을 냈었다”고 말했다.

순수한 즐거움으로, 절실함으로 쓴 건 결국 첫 시집 뿐이었다. 이후로는 계속 대중과 시장의 요구에 맞춰 시를 썼다. ‘안녕’이란 시집을 끝으로 시를 완전히 접고 도망친 이유였다. 그런데 이후 작사, 영화, 드라마 작업을 할 때도 모두 원태연에게는 그런 ‘로맨스’만을 원했다. 밀리언셀러 시인이란 타이틀은 영광이자 굴레가 되기도 한 셈이다.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절실함’을 불러일으키는데 탁월한 그이지만 그래도 ‘원태연 표’라고 세상이 이름 붙인 한계는 뛰어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 나이에 계속 그렇게 쓰는 것도 웃긴 일”이라고 했다.



이번 시집은 구작 70편과 20년 만에 새로 쓴 시를 합친 만큼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서 어느 정도 톤을 맞췄다. 그는 “독자들이 보기에 신작과 구작 간 온도차가 없다면 잘 쓴 것이다. 그래도 묵직한 남자가 쓴 것 같은 시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돌아온 그의 바람은 이제 “근사한 남자가 쓴, 진짜 근사한 시를 쓰는 것”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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