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2020년 배경’ SF소설 쓴 김승옥… 그 현장에 다시 서다

이호재 기자 입력 2020-10-29 03:00수정 2020-10-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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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동아일보에 SF소설 게재
‘무진기행’ 작가 김승옥 필담 인터뷰
“동아일보 옛 건물서 집필 의뢰받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
1990년생 기자가 2020년 사는 내용… 영상통화 -자율자동차 등장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옛 사옥(일민미술관) 앞에 선 김승옥 작가. 김 작가는 1970년 이곳에서 50년 뒤 동아일보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SF소설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광화문 사거리 한 모퉁이를 돌아서자 ‘동아일보 사옥’이라 쓰인 비(碑)가 보였다. 김승옥 작가(79)는 손짓으로 “이곳이 50년 전 SF소설을 의뢰받은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눈에는 1970년과 2020년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소설 ‘무진기행’(1964년) 등으로 1960년대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른 김 작가는 1970년 4월 창간 5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에 단편소설 ‘50년 후 디 파이 나인(D.π.9) 기자의 어느 날’을 실었다. 50년이 지나, 젊은 작가들은 이 소설을 오마주한 소설집 ‘SF 김승옥’(아르띠잔)을 펴냈다. 김 작가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며 현재 살고 있는 전남 순천에서 4시간 넘게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동아일보 옛 건물이 보고 싶다고 했다.

26일 김승옥 작가(오른쪽)와 1990년생 동아일보 기자가 필담을 나누고 있다. 아르띠잔 제공
50년 전 그가 쓴 소설은 1990년생 동아일보 기자 ‘준’이 2020년을 사는 모습을 그렸다. 26일 그와 인터뷰한 기자 역시 1990년생이다. 김 작가는 준과 대화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리에 함께한 후배 작가가 “준은 네 살짜리 딸이 있는 기혼자인데 지금 만 30세는 결혼할 생각도 안 한다”고 농담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김 작가는 1970년 3월 평소 친분이 있던 동아일보 기자에게서 SF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마감 기한은 단 이틀. 김 작가는 “사옥 근처 호텔방에 갇혀 밤새워 가며 썼다”면서 “써보지도 않은 SF소설을 쓰다 보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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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에 SF소설은 흔치 않았다. 한국 작가의 SF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던 탓에 그는 해외 SF소설과 각종 문헌을 뒤져가며 미래를 상상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 작가의 예측은 놀라울 정도다.

김승옥 작가가 쓴 SF소설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의 상편이 실린 197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15면.
소설에서 준은 얼굴을 보고 통화하는 ‘수상(受像) 전화기’로 상사에게 보고하고, 정자와 난자를 결합시켜 ‘인공 자궁’으로 임신한다. 영상통화와 시험관 시술이 보편화된 현재를 꿰뚫어본 듯하다. 김 작가는 “50년 후면 한국과 중국 관계가 좋아질 것 같아 소설에 비행기를 타고 중국 푸저우로 여행하는 장면도 넣었다”고 했다.

소설에는 자율주행자동차도 나온다. 심지어 준의 자율주행차 이름은 ‘귀요미19’다. 현재 일부 국어사전에 ‘예쁘거나 애교가 있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표제어로 올라있는 귀요미는 인터넷이 상용화된 2000년대 나타난 신조어다. ‘귀요미19’라는 명칭은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지금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김 작가는 “귀요미는 ‘귀염둥이’라는 뜻으로 지은 단어”라며 “당시 한국에서 출시되는 자동차도 영어 이름을 많이 썼는데, 한국어 이름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고 했다.

‘서울, 1964년 겨울’처럼 현실을 그리던 김 작가가 SF소설을 택한 건 당시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암울한 시절이라 당대의 이야기를 쓰면 주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미래를 얘기하는 척하며 현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소설 곳곳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식 풍자가 숨어 있다. 대통령은 TV 프로그램 ‘대통령과 아침을’에 나와 국민과 담소하지만 이는 재선을 위한 포석으로 묘사된다. 국민은 노이로제를 치료하는 알약을 먹으며 우울한 현실을 외면한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작품을 쓰면서도 미래의 사람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김 작가에게 인터뷰는 그의 소설 ‘무진기행’ 속 안개 가득한 무진을 걷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2003년 갑작스레 뇌중풍(뇌졸중)을 겪은 뒤 자신의 의사를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는 기자의 입을 보며 질문을 이해했고 메모지에 글을 써서 답했다. 이날 오후 느지막이 인터뷰를 끝낸 김 작가는 홀로 기차를 타고 자신만의 ‘무진’, 순천문학관으로 돌아갔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김승옥 작가#sf소설#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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