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구매하려는 해외 팬들 방문 이어져…글로벌한 관심 아직은 얼떨떨”[전승훈 기자의 도시산책]

전승훈 기자 입력 2020-07-11 14:01수정 2020-07-1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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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골목에서 만난 그녀의 치마에는 ‘태평장춘’(太平長春)’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태평’은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없이 평안하다는 뜻이고, ‘장춘’은 어느 때나 늘 봄빛 같다는 말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조선왕실 궁중보자기 유물에 새겨진 글씨였다. 궁중보자기에는 한 쌍의 봉황, 모란꽃, 석류와 같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에서 제니와 로제 씨가 입은 봉황무늬 크롭탑, 분홍색 도포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이 문양이예요. 조선왕실 궁중보자기 유물에서 새겨진 패턴이죠.”

한복브랜드 단하주단의 대표 디자이너 단하 씨(30). 4인조 걸그룹 블랙핑크의 ‘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공개된지 8일 만에 최단기간 조회수 2억회를 돌파하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그는 가장 힙한 한복디자이너로 떠올랐다.

블랙핑크는 네 명의 멤버 모두가 샤넬(제니), 생로랑(로제), 셀린(리사), 버버리(지수) 등 명품 패션하우스를 대표하는 뮤즈다. 이번 뮤직비디오에서도 알렉산더 맥퀸 2020 리조트 컬렉션, 샤넬 S/S 2020 의상 등 화려한 명품 컬렉션을 선보인다. 미국 패션잡지 보그는 ‘럭셔리 컬렉션 런웨이 패션을 담은 화려한 오락물’이라고 평할 정도다.


그런데 마지막 하이라이트 군무 장면에서 블랙핑크는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블랙핑크의 패션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전세계 매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또한 지난달 26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NBC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복 의상만 입고 춤을 췄다. 미국 패션잡지 엘르는 “4명의 소녀들이 한국 전통의상인 한복에 현대적인 분위기를 가미해 개성있는 스타일로 연출한 장면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고 보도했다. 유튜브에선 블랙핑크의 개량한복을 입은 해외 팬들의 커버댄스 영상이 벌써부터 쏟아지고 있다.

7일 서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단하 씨는 “갑자기 쏟아진 글로벌한 관심이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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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가 나온 후 해외에서의 반응은.

“블랙핑크가 입은 한복은 원래 저희 회사 온라인숍에서 팔던 제품이다. 뮤직비디오 공개 후 온라인숍에서 한복을 구매하려는 해외팬들의 방문이 하루에 3000~4000명 씩 이어지고 있다. 있다. 미국 쪽이 50% 이상이고, 나머지는 유럽과 중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 팬들이다. 팬클럽이나 현지 편집숍 같은 곳에서 단체로 대량구매 주문도 들어온다. 그동안 동양여성의 전통의상이라고 하면 ‘기모노’를 떠올렸는데, 이제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진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블랙핑크가 입은 한복은 어떤 옷인가.


“제니 씨가 입은 분홍색 의상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입고 다니던 겉옷인 ‘도포’다. 한복에서여자 저고리, 치마 만들 때 잘 쓰는 ‘노방’이라는 소재로 만든 투명한 시스루 옷이다. 단하주단 온라인숍에서 52만 원에 팔리는 옷인데, YG에서 구매해 간 후 무대에서 춤출 때 편하도록 리폼을 했다. 총 길이 74cm인 도포의 하단을 잘라 배를 드러내는 짧은 자켓으로 연출했고, 남은 천은 아래에 둘러 치마처럼 표현했다. 도포 위에 덧입은 배자는 겨울에 방한용으로 입는 조끼다.


로제 씨가 입은 크롭탑(14만 원)은 조선시대 여성 속옷인 ‘가슴가리개’를 밖으로 노출한 의상이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조선시대 궁중보자기에서 사용된 봉황문 무늬를 새겨 넣어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그 위에 입은 검은색 겉옷은 ‘철릭’(88만 원)으로, 조선시대 무관들이 입었던 공복이다. 원래 철릭은 붉은색이나 다양한 색이 있었는데, 검은색은 잘 입지 않았다. 제가 특이하 검정색으로 만들었다. YG측에서 블랙과 핑크색 의상을 주로 골라서 사간 것 같다.(웃음)”

―YG나 블랙핑크 하고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

“YG스타일리스트가 저희 회사 홈페이지나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을 주신 것 같다. 블랙핑크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기 2주 전 쯤인 6월 초 쯤에 YG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한복진흥센터에서 주최하는 신진 한복디자이너 공모전에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원주에 다녀오던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YG측에서 여러 가지 옷을 검토한 후에 구매해갔다. 사람들은 제가 금수저로 태어나 인맥 넓어 누군가가 YG에 꽂아준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아무런 네트워크도 없는, 설립한지 2년차 밖에 안되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젊은 디자이너일 뿐이다. 지난해 10월에 캐나다 밴쿠버 패션위크에 선 적이 있는데, 제니와 로제 씨가 입은 한복도 그 때 출품됐던 작품이다. 아마도 YG스타일리스트가 그 패션쇼를 눈여겨보고 연락을 주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단아 씨는 대학에서 중어중문학과를 전공한 후 제주도 카지노에서 딜러와 영업직으로 일했던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후 온라인 한복 대여사업을 시작한 그는 조선궁중복식연구원에서 조경숙 명인에게 전통한복과 궁중한복 제작법을 사사했다. 현재는 성균관대 의상학과에서 전통복식 궁중복식 연구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한복진흥센터에서 지원하는 신진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이 4명인 한복 브랜드 ‘단하주단’을 운영하고 있다.


―블랙핑크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블랙핑크가 엄청나게 많은 의상을 입고 뮤비를 찍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최종편집본이 나오기 까지 블랙핑크가 저희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뮤비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YG에서도 진짜 극소수의 관계자들만 안다고 한다. 의상을 준비한 스타일리스트 팀도 최종 편집에 어떤 의상이 들어간지 모른다고 하더라. 뮤비가 공개되는 날 가슴을 졸이면서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기다렸다. 뮤비 마지막 군무 장면에서 우리 한복을 입고 나오는 걸을 보고 직원들끼리 다같이 소리지르고, 하이파이브하고 난리가 났다. 미국 컴백무대인 지미 팰런쇼에서도 한복을 입고 나와서 더더욱 임팩트가 컸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과 방탄소년단(BTS)이 한복을 즐겨 입은 영향으로 한복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킹덤’이 나온 후 아마존에서는 한국의 전통모자인 ‘갓’을 구매하려는 열풍이 불었다. 최근 BTS의 멤버 슈가도 솔로곡 ‘대취타’에서 한복을 입고 나온다.

김민경 한복진흥센터장은 “최근 구글 트렌드에서는 ‘한복(hanbok)’이라는 키워드 검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며 “K팝이나 드라마는 한글로 전세계 팬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패션도 우리 고유의 한복을 당당히 내세우며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배꼽티’처럼 보이는 한복이 생소하다는 반응도 있다.

“걸그룹이 본격적으로 한복을 입고 격렬한 댄스를 춘 것이 처음이다. 한복으로서는 노출이 심한 편이어서 더욱 그런 논란이 벌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반응이 좋다. 전통의상을 리디자인한 패션 중에 가장 힙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국내에서와 달리 세계 젊은이들에게 한복이 화려한 파티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같다. 만약 우리가 판매하는 한복의 원형 그대로 블랙핑크가 입고 나왔으면 이슈가 덜 됐을 것 같다. 오히려 무대에서 댄스 퍼포먼스형으로 커스텀(재가공)됐기 때문에 눈에 더 잘 띄고,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 한복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오랜세월 동안 다양한 유행을 겪었다. 특정시대 한복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것도 새로운 한복의 유행이라고 자유롭게 생각하면 좋겠다. 해외에서 한복이 댄스 파티의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한복 디자인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 졸업 후 20대 중반부터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캐리어에 한복을 싸가지고 다녔다. 미국이나 유럽의 관광지에 가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를 좋아했다. 한복을 여러벌 싸갈 수 없기 때문에 치마를 양면으로 제작했다. 한 쪽은 빨강, 다른 쪽은 파랑색으로 만들면 한 벌로 두벌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복을 만들 줄 모르니까 원단을 사다가 한복집에서 맞춰서 입고 다녔다. 이후 내가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궁중복식연구원에서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해외에 가면 한복의 실루엣이 아름답다며 함께 사진 찍어달라, 어디서 살 수 있느냐, 내가 편집샵을 운영하는 데 납품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쏟아졌다. 인스타그램에서 한복입은 사진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온라인 한복 대여숍을 열었다. 투잡으로 하다가 한복 대여사업 수입이 월급보다 훨씬 많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2018년에 단하주단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블랙핑크 옷에 있는 궁중보자기 봉황문은 어떤 무늬인가.

“영국에는 리버티 원단, 해리스트위드 원단처럼 각 나라를 대표하는 원단 패턴이 있는데, 우리나라도 충분히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원단 텍스타일 디자인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해왔다. 성균관대 의상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공부하던 중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궁중보자기를 발견했다. ’태평장춘‘이라는 글씨의 뜻도 좋고, 봉황, 모란꽃, 석류, 불수문, 복숭아 문양이 아름다웠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서 궁중보자기 유물을 본 따서 하나하나 손으로 그렸고, 그걸 디지털화해서 리디자인한 후 특허를 냈다.”


―요즘엔 20대 여성들이 평소 나들이에도 한복을 많이 입는다.

“예전에는 한복은 설날, 추석과 같은 특별한 명절에만 입는 옷이었는데, 요즘에는 한복이 일상생활에서도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외국인 관광객 뿐 아니라 국내의 젊은이들도 한복차림을 하고 익선동, 전주한옥마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으로 올린다. 고객들은 여고생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우리 온라인숍에서는 ‘허리치마’가 대표상품인데, 맞주름 바느질을 했기 때문에 속옷에 와이어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퍼지는 효과가 있다. 랩형식으로 둘러 입으면 되기 때문에 허리 사이즈 24~35인치까지 모두 입을 수 있다. 워낙 편하면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효과가 나서 최고 인기상품이다. 지난해 허리치마로 크라우드 펀딩을 했는데 한달만에 4000만원 이상이 펀딩이 됐다.”

단하 대표는 ‘업사이클링 한복’으로도 유명하다. 버려진 웨딩드레스를 한복으로 고쳐 입는다거나, 플라스틱을 재생해서 만든 원단으로 한복을 만드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업사이클링 한복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언젠가 웨딩샵에서 입지도 않는 드레스가 무수히 버려지는 장면을 봤다. 웨딩드레스에 쓰이는 원단은 고급 실크와 레이스로 엄청난 재료비와 공임이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혼식 드레스를 찾을 때 항상 ‘신상품’을 먼저 찾는다. 그래서 반시즌만 지나도 유행이 지났다고 버려지는 드레스가 많다. 한번도 입지 않았는데도. 그런 웨딩 드레스를 해체해서 하나의 원단을 만들어 전통한복으로 재탄생시켜서 서촌의 ‘풍류관’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다. 웨딩드레스의 실크와 한복의 비단은 같은 소재인데다, 웨딩드레스가 흰색이라 다양한 색깔로 변화시키고 실험할 수 있어 무척 재밌는 재활용 과정이었다. 올해 9월에는 웨딩드레스를 업사이클링한 원단으로 왕의 복식인 곤룡포를 모티브로 한 신한복을 만들어 전시할 예정이다. 또한 자연섬유와 페트병에서 추출한 원사를 섞어서 만든 리사이클 원단으로 사람에게도 친환경적인 한복을 만드는 작업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포부는.

“중국에 상하이탕이라는 명품브랜드가 있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판매하는 브랜드다. 상당히 고가인데 전세계 주요 백화점에 다 입점돼 있다. 우리 한복브랜드도 K팝 열풍을 타고 세계에 많이 알려져서 백화점 1층에 샤넬 옆에 명품브랜드로 입점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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