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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힘없던 조선 떠나 100년 넘게 우리 춤, 우리노래 지켜온 예술가들[전승훈 기자의 도시산책]

입력 2020-07-28 12:24업데이트 2020-07-2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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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여는 주재근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
지난해 열린 제1회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세계 곳곳에는 700만 명의 우리 동포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춤, 우리노래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예술가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한민족 동포와 예술인들을 초청하는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가 올해도 8월18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다. 이 축제는 지난해 광복절에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 남산국악당, 정효아트센터에서 기념식과 초청공연, 축하공연, 강습 등 3박4일 동안 열렸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5개국에서 활동 중인 40여 명의 전통예술인들이 참여했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해 온 주인공은 정효국악문화재단의 주재근 대표(48)다. 주 대표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대금을 전공하고, 국악이론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박사), 21년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무원으로 경력을 쌓은 후 현재는 민간예술단체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현장과 이론, 행정경험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예술의 대중화를 이루는 데 힘써왔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기획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열린 제1회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전 세계에 살고 있는 700만 명의 우리 동포들 중에는 19세기 조선이 힘이 없어 이주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고국을 떠난 우리 민족은 고려인, 조선족, 제일교포 등으로 불리우며 100년이 훨씬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을 고국이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우리 문화를 더 잘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올해 이 축제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 19)’로 인해 8월18일 하루만 열리며 국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 예술가들과 국내 명인 명창 등이 무대에 오른다. 재일동포인 민영치(타악), 쿠라시케 우희(무용), 김보경(가야금), 쿠와히로유키(타악), 조선족 예술가인 최민(대금), 윤은화(양금), 북한출신 무용수 최선아, 미국교포 서훈정(판소리)이 출연한다. 또한 국내 명인으로는 문정근(춤), 김영동(대금), 이수현(춤), 산유화어린이민요합창단(민요) 등이 참여한다.

―앞으로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는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

창덕궁 고궁공연 해설하는 주재근 대표
“전세계 한민족 예술가들의 네트워킹을 위해 상설적인 ‘한민족공연예술센터’ 건립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 센터를 거점으로 전세계 한민족공연예술가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전세계 태권도 도장을 통해 태권도 보급이 세계화 됐듯이 세계한민족공연예술센터를 통해 국악과 클래식 등 우리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 지금은 전통공연예술에 국한하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서양음악을 하는 해외 한민족 공연예술가로도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한양대 국악과에서 음악인류학 박사학위를 한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과, 국립국악원 등에서 문화예술 진흥정책을 담당해 온 공무원으로 21년간 일한 뒤 퇴직, 우리 음악의 대중화를 연구하고 기획하는 이를 해왔다. 그는 정효아트센터에서 국악계 신인연주자들과 원로급 예술인과의 소통의 장을 만드는 한편, 전통음악은 물론 서양의 클래식까지 한국의 공연문화 발전을 목표로 하는 (사)공연전통예술미래연구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창덕궁 고궁공연
그는 문체부 공무원 시절 ‘궁궐에서의 국악공연’을 처음 시도하고,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됐던 국악기를 112년만에 고국에 귀환시키는 전시를 기획하고, ‘만파식적’ 3D 입체영상을 만드는 등 국악계에 영향을 끼친 굵직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예산을 마련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그의 특기다.

“2006년 우리 음악을 외국인이나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더 친근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문득 고종이 100여년 전 주한외교사절들과 연회를 베풀었던 덕수궁 정관헌에서 주한 외국대사와 부인들을 위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보다 많은 주한 외교사절이 오기 위한 유인책이 필요했다. 그때 외국대사와 부인들에게 맞춤 한복을 선물해 주면 모두들 오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결과는 대박이었다. 독일, 일본 등 40개국 60명의 주한 외교사절이 참여했고 이들은 우리의 전통음악과 궁중무용감상과 사물놀이 체험, 전통차와 다과를 즐기고 마지막 순서로 덕수궁 정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날 행사는 당일 저녁 9시 메인뉴스에 중요하게 보도됐다.

창덕궁 궁중연례악
이를 계기로 2008년부터는 덕수궁은 물론 창덕궁 연경당에서 상설국악공연을 열게 됐다. 그런데 당시에는 궁에서 행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회분위기였다. 문화재청에서도 일회성 행사는 몰라도 상설공연에는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고궁활용심의위원회에 참석해 직접 PT를 하며 설득한 끝에 겨우 허가가 떨어졌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와 4시에 창덕궁 깊은 곳에 위치한 연경당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최고 감동의 공연 무대로 소문이 났다. 한 영국 회사 임원은 서울에 출장을 수십번 왔지만 갈 곳이 없었는데 대낮에 이렇게 멋진 공연을 본건 본인 인생에서 생애 최고였다고 찬사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궁공연은 문화재청의 ‘고궁달빛기행’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고궁공연의 성공에 이어 지역마다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고택(古宅)에서도 공연이 열리게 됐다. 예전 조선조 선비들이 풍류음악을 즐겼던 것처럼 고택에서 우리의 음악과 무용을 즐기는 것이다. 이에 각 지자체와 협력해서 전국의 고택을 선정하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주5일제와 맞물려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됐다.”

―대금 연주자에서 공무원이 된 계기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대금 연주자를 꿈꿨다. 그런데 전문적인 대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이나 KBS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가는 것보다 대학에서는 국악이론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전통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연주 한번 하는 것 보다 더욱 가치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교학사 음악편집 담당으로 입사해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중학교 음악교과서를 새롭게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 국악 이론을 전공한 사람으로써 서태지와아이들로 대변되는 시대적 감각에 맡는 신선한 국악을 교과서에 넣을 수 있게 돼 마음이 설렜다. 당시 교과서에 국악과 양악의 비율은 10:90 정도였는데 국악비율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국악대중가요로 인기를 얻고 있던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을 작곡자 허락을 직접 받고 국악관련 사진들로 세련된 사진들로 모두 교체했다. 음악교과서의 혁신이라 할 정도로 바꾸었는데 당시 교과서 저자 중 서양악 전공 교수분이 최종본을 보고 왜이리 국악이 많냐며 자기는 승인 못하겠다고 교과서를 바닥에 내팽겨쳐 버렸다. 그 분이 돌아가자마 마자 담당 과장님께 사직서를 내고 화장실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국악을 대하는 우리 사회였구나’ 생각을 하니 모든 전통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다. 그때 다짐하였던 것이 앞으로 국악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한 일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 대표는 1997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 국가공무원 특채로 학예연구사로 임용됐다. 21년 동안 국립민속악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 국악진흥과, 장악과, 국립부산국악원 등 공연, 연구, 진흥 등의 국악의 전반적인 일을 맡았다. 그는 “특히 2006~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팀에서의 근무는 국립국악원만이 아닌 국악계와 문화예술계 전반을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며 “당시 만들어낸 국악정책과 예산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문화예술정책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와도 인연이 깊다. 2005년 9월27일자 동아일보에 났던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됐던 국악기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고, 이 국악기를 112년 만에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귀환하는 전시를 기획했다.

고국으로 돌아 온 파리만국박람회 국악기 전시
“당시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운영을 맡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언젠가는 프랑스에 있는 국악기들을 가져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2011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 의궤 297권이 돌아와 국가적 이슈가 됐는데, 2012년에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국악기를 가져오는 것도 또 다른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지 않고 무작정 파리 음악박물관으로 달려가 동아일보 사진에서 가야금을 들고 서 있던 필리프 브뤼귀에르씨를 만났다. 국악기 13점을 한국으로 가져가 전시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막상 승낙을 받고 보니 예산이 문제었다. 당해연도 예산은 작년에 기획재정부를 통과해 확보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다 보니 예산은 전무했다. 일은 저질렀고 포기하면 국제적 신뢰도가 무너지고 해서 협찬을 받으러 뛰어 다녔다. 좋은 일에는 다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실감했다. 아시아나항공에서 화물운송을 협찬해 주었고, 우리은행, 프로비스타호텔, 고흥곤국악기등에서 협찬금을 내준 것이다. 공무원이 일을 만들어 땀을 흘려가며 뛰어다는 것을 보고 프로비스타호텔 회장님이 주의깊게 보고 계시다 후에 당신이 설립한 정효국악문화재단에 대표이사를 내게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의 국내전시는 모든 언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YTN에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악기 환영식을 실시간으로 생중계 방송을 했다. 2012년 파리만국박람회 전시 성공은 2013년에 1894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출품됐던 국악기의 국내전시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 예산 확보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는데 신세계에서 지난해 전시를 보고 매년 2억원을 협찬해 주기로 한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 온 파리만국박람회 국악기 전시
그는 2003년 국악박물관에서 신라 ‘만파식적’ 설화를 소재로 한 3D 입체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예산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기획재정부 예산 담당관을 10번 이상 찾아가 읍소한 끝에 1억8000만원의 예산을 받아 ‘만파식적’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후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3D 입체영상을 만든 것을 보고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등에서도 3D 입체영상을 만들게됐다.

―공무원에게는 예산을 따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노하우는.

“2018년 10월 국립부산국악원 장악과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가장 큰 상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전 직원이 매년 투표하여 직급별로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선정 수여하는데 2019년에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심각한 현안이 있었는데 계약직 단원 약 30여명이 2년 경과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내가 있을 때 위반한 것이 아니니 그냥 시간끌기 하다 서울로 발령받아 가는 것,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절대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A안, B안등을 마련해 우선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에게 상담을 하여 법적 검토를 끝내고 실행에 들어갔다. 기획재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는 세종시를 부산에서 하루가 멀다 찾아가고 기획재정부 담당자 카톡으로 매일 같이 메시지를 남겼다. 부산의 오늘 날씨가 어떻고, 재미있는 콩트도 보내고 스토커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해당되는 단원들을 앞세워 기획재정부로 찾아가 눈물로 절박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2018년 말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카톡이 왔다. 국립부산국악원 단원 15명 증원하기로 했다는 문자였다. 그대로 심장은 멈추었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정말 세상은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구나 라는 인생의 진리를 새삼 알게 됐다.”

―대금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전남 여수의 시골 마을 여선생님 자취방에서 본 베토벤 석고 두상은 아직도 내 인생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 학년에 30명 남짓의 한 반밖에 없는 전교생 300여명의 아주 작은 초등학교로 첫 부임한 여선생님은 시골 어린이들에게 연극과 리코더를 가르쳤다. 수많은 별빛이 고요하게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앞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리코더 합주단의 연습은 각종 대회에서 상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된 뒤 낯설음을 적응하는데도 리코더가 제격이었다. 쉬는 시간 교실 한편에서 시작된 리코더 연주는 장기자랑 때마다 단골로 불려졌고 그 인기는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당시 진로는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음악선생님이 국립국악고등학교 진학을 권해주었다. 국악이라는 거부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보다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즐겁게 청춘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국립국악고등학교가 학비도 없고, 매월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입학 후 전공 악기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작은 피리 보다는 가로로 비켜 부는 커다란 대금이 근사해 보였다. 대금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선배들의 궁중음악부터 민간의 산조음악까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은 클래식이나 가요와는 다른 묘한 매력적인 음악으로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세계한민족예술축제를 기획하게 된 데 대해 대학에서 국악학을 전공하면서 해외의 음악교류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국악학의 세계를 가르쳐주신 권오성 교수님은 국악만이 아닌 서양음악학, 인류학, 종교학, 민속학, 언어학 등으로 사고를 넓고 깊게 해 주었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길을 뒤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은사이신 권 교수님은 중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의 학문적 교류에 이바지하신 분이다. 교수님의 해외 출장이나 세미나, 뒷풀이 자리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음악가와 학자들과의 만남은 국제음악교류의 필요성과 안목을 키우게 되었다.”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꼽히는 공무원은 왜 그만두었나.

“2019년 강사법이 통과되자 출강하고 있던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겸임교수는 9시간 이상 맡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공무원 규정상 4시간 이상 외부출강은 금지돼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2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는 사회에서 뜻을 실행하는 시점이라 생각됐다. 2019년 4월30일자로 명예퇴직하고 5월1일자로 민간 최초 국악문화재단인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 이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침체 위기의 정효국악문화재단이 지금은 여러 기획공연으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2020년부터는 국내 최고 권위의 동아국악콩루르가 열리는 장소가 됐다. 앞으로도 여러 기관과 협업하는 문화재단을 지향하고 있다. 2학기부터는 이화여대 초빙교수 외에 한양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공연기획론, 홍보마케팅론, 국악학연구방법론, 국악사특강, 국악문헌특강등 여러 강의를 맡고 있다. 국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사회경험을 쌓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공연문화예술정책 마련 및 대안 제시를 위한 사단법인을 지난해 7월에 설립했다.”

주 대표는 올해 5월부터는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전문위원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국제교류자문위원, 서울시남산국악당 예술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정책이 변함으로써 체육이 활성화 됐듯이 ‘엘리트 음악에서 생활음악으로’라는 모토를 내건 ‘대한민국생활음악축제’를 계획하고 있다”며 “21년간의 문화예술행정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문화브랜드 상승과 온 국민에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정책 개발 및 활용, 그리고 지역의 균형적 문화발전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음악의 강국인 우리나라에 아직 국립음악박물관이 없는 것이 아쉽다”며 국립음악박물관 건립 추진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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