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에 우뚝… 완벽한 럭셔리카를 상징하다

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후드 오너먼트는 판테온 그릴, 더블 R 모노그램과 더불어 롤스로이스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Rolls-Royce Motor Cars 제공

그리스 신전을 형상화한 판테온 그릴, 두 개의 R자를 겹친 모노그램과 함께 롤스로이스를 상징하는 대표적 요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우리말로 ‘환희의 여신’으로 해석하는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Spirit of Ecstasy) 상이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의 보닛 앞에 솟아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차가 롤스로이스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만큼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상은 유명하다.

이처럼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를 알아차릴 수 있는 상징적 기호나 디자인, 물건을 가리켜 흔히 엠블럼(emblem)이라고 한다. 엠블럼은 어떤 것의 정체성이나 지향하는 가치를 기호화한 로고가 될 수도 있고, 특정 지방이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crest)이 될 수도 있다. 자동차에서는 엠블럼 중에서도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상처럼 차 보닛 위에 달린 상징적 조형물을 뜻하는 표현이 따로 있다. 바로 후드 오너먼트(hood ornament)다.

후드 오너먼트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엔진룸 덮개, 즉 보닛을 뜻하는 후드에 다는 장식이라는 뜻이다. 현대적인 자동차에서는 이것이 상징성을 가진 장식물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드 오너먼트는 처음 등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장식적인 특성과 더불어 기능적 역할도 함께 갖고 있었다.

초기 자동차는 엔진 냉각수를 식히는 장치인 라디에이터가 차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라디에이터 위에는 대개 냉각수를 확인하거나 보충할 수 있는 마개가 달려 있었다. 라디에이터는 차의 맨 앞에서 앞 유리까지 이어지는 엔진룸 덮개, 즉 후드가 시작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차에 탄 사람은 라디에이터 마개 위치를 보고 차의 맨 앞 부분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벤틀리가 과거 일부 모델에 달았던 여러 형태의 ‘플라잉 B’ 오너먼트. 신형 플라잉 스퍼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현된다. Bentley Motors 제공

이처럼 라디에이터 마개는 차 안에서 앞을 보았을 때 뚜렷하게 눈에 띄는 위치에 있는 만큼 차에 탄 상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차체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 착안해 럭셔리카 브랜드나 그들이 만든 차를 사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차의 호화로움과 특별함을 상징하는 장식물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후드 오너먼트가 등장했고, 곧 럭셔리 카의 상징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191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후드 오너먼트는 자동차 시장의 성장과 함께 여러 브랜드가 등장하며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했다. 특히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차체와 실내를 맞춤 제작하는 코치빌딩이 절정기에 이르렀던 1920, 30년대에 럭셔리 카를 상징하는 요소로 자리를 굳혔다. 많은 브랜드가 개성 있는 후드 오너먼트로 호화로움을 뽐냈다. 차를 구매하는 사람이 조각가에게 주문해 황동이나 청동으로 자신만의 것을 맞춤 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창 후드 오너먼트가 인기 있을 때에는 크리스털이나 유리로 만들어 조명을 넣은 것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의 유명한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였던 피어스애로(Pierce-Arrow)의 궁수, 스페인 이스파노수이사(Hispano-Suiza)의 황새, ‘라 코코트(La Cocotte·암탉)’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프랑스 부아쟁(Voisin)의 독수리 등은 지금도 우아함과 세련미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역대 가장 호화로운 부가티로 손꼽히는 타입 41 루아얄에는 특별히 ‘춤추는 코끼리’를 형상화한 후드 오너먼트가 쓰이기도 했다. 이것은 부가티를 창업한 에토레 부가티의 동생으로,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요절한 렘브란트 부가티가 생전에 남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이 후드 오너먼트는 극소수만 제작된 타입 41 루아얄과 더불어 많은 자동차 애호가에게 높은 희소성과 상징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후드 오너먼트의 인기는 크게 사그라진다. 럭셔리 카를 소비하는 계층이 크게 위축되면서 후드 오너먼트를 즐겨 썼던 럭셔리 카 브랜드들은 대부분 쇠락했다. 아울러 공기역학적인 유선형 차체를 쓰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차체 앞에 드러나 있던 라디에이터가 차체 안으로 자리를 옮겼고 라디에이터 마개는 보닛을 열어야만 볼 수 있게 되었다.

후드 오너먼트의 유행이 막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안전 관련 규제였다. 충돌사고 때 특히 보행자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차 외부로 돌출되는 물체를 달 수 없도록 관련 법규가 강화되었다. 특히 시장 규모가 큰 미국과 유럽에서 규제가 시작되면서 과거와 같은 고정식 후드 오너먼트는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아울러 자동차의 성능이 점점 더 좋아지면서 빠른 속도로 달릴 때 공기저항을 높이고 소음을 일으켜 차의 성능과 정숙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도 럭셔리 카 브랜드들이 후드 오너먼트를 포기하는 이유였다.

이스파노수이사의 황새 오너먼트. Nave.notnilc/CC BY-SA 3.0 제공

물론 그와 같은 발전 과정에서도 여전히 후드 오너먼트를 고집한 브랜드들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롤스로이스로,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상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롤스로이스와 더불어 몇몇 럭셔리 및 프리미엄 브랜드는 후드 오너먼트 아래에 스프링 구조를 달아, 힘이 일정 수준 이상 가해지면 자연스럽게 꺾이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롤스로이스는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판테온 그릴 안으로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상을 감출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벤틀리는 최근 후드 오너먼트의 부활을 알렸다. 벤틀리는 오랫동안 배지 형태로 만든 엠블럼을 보닛 앞에 달아 왔는데, 내년부터 소비자에게 인도될 신형 플라잉 스퍼 세단에 새로 디자인한 ‘플라잉 B’ 오너먼트를 쓰기로 한 것이다. 벤틀리는 이를 통해 1930년대 일부 벤틀리에 추가 비용을 내고 선택해 달 수 있었던 특별한 오너먼트를 현대적으로 재현했다.

오리지널 플라잉 B 오너먼트는 롤스로이스의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를 처음 디자인한 찰스 사이크스의 손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좌우 어느 쪽에서 보아도 벤틀리의 머리글자인 B자와 날개 모양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당대 많은 벤틀리 오너가 오너먼트를 따로 주문제작해 달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 벤틀리 차들 가운데 플라잉 B 오너먼트를 단 것은 흔치 않다.

새 플라잉 스퍼에 쓰이는 새 오너먼트는 전동식으로 작동해 드러내거나 숨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이미 롤스로이스가 현대적인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오너먼트에 쓰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벤틀리의 것은 오랫동안 벤틀리가 써온 날개 엠블럼이 덮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너먼트를 숨기더라도 브랜드의 상징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별함과 상징성은 럭셔리 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 요소를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중 하나가 후드 오너먼트다. 럭셔리 카 브랜드들은 새로운 기술을 통해 후드 오너먼트의 존재를 위협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작은 부분들까지 심혈을 기울여 가치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럭셔리 카가 ‘럭셔리’로 남게 하는 원동력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