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문학계 사상 첫 동시 3관왕 작가 켄리우, 첫 장편소설 국내 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7일 16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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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 제도를 통일한 황제는 성대한 축하연을 연다. 포로로 잡혀온 500여 명의 무희를 앞세워 승리의 팡파레를 울리려는 찰나. 하늘에서 연처럼 생긴 자객이 활강해 황제에게 불덩이를 던져댄다. 첫 장면부터 이국적 정취가 물씬한데 읽다보니 강한 기시감이 든다.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그린 중국 역사소설 ‘초한지’와 겹친다.

휴고·네뷸러·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받은 미국 공상과학(SF)계 샛별 켄 리우(43)의 첫 장편이 국내에 출간됐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 3부작’의 1부 격인 ‘제왕의 위엄 상·하’(황금가지·각 1만5800원)다. 단편집 ‘종이 동물원’(황금가지·1만5800원)에 이은 두 번째 국내 출간이다.
6일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적 초한지 영웅들로 이야기를 지어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했다. 12살에 미국에 건너온 뒤 사전을 뒤져가며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그의 인간적인 역사 기록 방식에 깊이 매료됐다. 이후 ‘역사의 기록’과 관련한 작업을 과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초반에 소설은 초한지의 서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후세의 영웅 쿠니와 마타의 성장담, 다라 제도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뼈대를 이룬다. ‘지록위마’와 만리장성 쌓기 일화(해저터널로 변주)도 등장한다. 그는 “첫 장편에서 건국 신화의 개념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로 사마천을 뛰어넘을 수 없겠지요. 설정의 변주보다는 다라 제국 건국 신화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를 중심으로 읽으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작품의 배경은 모호하다. 대나무 비단 같은 예스러운 소재와 최첨단 기술이 결합해 미래와 과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공간을 빚어낸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가상의 과거를 다룬 ‘실크펑크(Silkpunk) 장르다. 치밀한 세계관 설정을 위해 방대한 작업이 동반됐다. 고고학과 기계공학 논문을 뒤져 한(漢)대의 방직기, 한국의 거북선, 폴리네시안의 발화(發火) 기술을 파고들었다.

“경제학자 W. 브라이언 아서의 ’언어로서의 기술‘ 개념에서 ’실크펑크‘를 떠올렸어요. 소설 속 기술 언어의 어휘는 대나무 산호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재료로, 문법은 ’생체모방 기술‘을 따르죠. 제가 만든 세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어 실험하다가 감전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때로 SF의 외피를 입은 현실 은유로 읽힌다. 전쟁의 책임을 묻는 신에게 황제가 “더 많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흘린 피였다”고 항변하거나, 분서갱유에 빗대 “세상은 아직 너무나 불완전했고, 위대한 인간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라 설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권력, 정의, 공정은 까마득히 오래된 문제다. 판타지는 현실에 기반한다. 사회를 비판하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설과 현실을 연관짓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작가는 중국에서 태어나 12살에 미국에 건너갔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졸업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 로펌 변호사를 거쳤다. 지금은 낮에는 기술 전문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꼬리표에 분열과 갈등이 내포됐을 거라 여기는데, 저는 오히려 즐거워요. 다양한 전통을 섞어 나만의 문화공간을 빚어낼 수 있으니까요. 가상의 놀이 공간을 창조하고 싶다는 충동이 저를 글쓰기로 이끕니다. 한국 독자들도 다라 제도에서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이설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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