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년 전 사리 그릇, 국보된다…부여 왕흥사지 출토

  • 뉴시스
  • 입력 2019년 4월 1일 11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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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 공예품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가 국보가 된다.

문화재청은 577년 제작된 보물 제176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로 이름을 바꿔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 왕실 사찰인 왕흥사터의 목탑지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사리기 중 가장 오래됐다.
출토 당시 금당인 대웅전 앞 목탑지에 사리를 넣은 네모난 구멍 사리공에서 진흙 속에 잠긴 채 발견됐다. 이후 보존처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처나 승려의 수행 결과로 몸속에 생겼다는 구슬 모양 유골인 사리를 보관한 사리기는 겉에서부터 순서대로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순으로 구성된 용기다. 청동제사리합 겉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577년에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명문에 의하면 이 사리기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고자 발원한 왕실 공예품이다. 제작 시기가 명확한 사리기로서, 연대가 가장 빨라 우리나라 사리기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는 점이 큰 의의로 꼽힌다.

공예적 측면에서도 안정되고 세련된 형태,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합한 기법,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줘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가 엿보인다.

특히, 단순하고 단아한 모습과 보주형(寶珠形) 꼭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문양은 525년 조성된 ‘공주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公州 武寧王陵 出土 銀製托盞)’과 639년 제작된 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를 조형적으로 연결한 도상(圖像)으로서 의의가 있다.

6세기 전반 사리공예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절대 연대를 가진 작품이라는 희소성, 뛰어난 작품성으로 우리나라 공예와 조형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문화재청은 또 조선시대 불화 2점과 문집 1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龜尾 大芚寺 三藏菩薩圖)’는 1740년 영산회상도, 제석도, 현왕도, 아미타불도와 함께 조성되어 대둔사에 봉안된 작품이다. 이 중 삼장보살도만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다.

이 불화는 세로 238㎝, 가로 279㎝의 대규모 화면에 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 등 세 보살의 모임을 묘사한 그림이다. 월륜, 치흠, 우평 등 18세기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높은 수미단 위에 앉은 세 보살과 인물들을 질서 정연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배치한 것으로 보아 이들 화승의 수준 높은 기량을 가늠할 수 있다.
삼장보살도의 도상은 1661년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이라는 경전에 근거한 것으로, 천장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인 약사여래처럼 약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약병을 든 천장보살의 모습은 같은 시기 다른 지역 불화에서는 좀처럼 확인되지 않고 경상북도에서만 집중적으로 그려져 18세기 삼장보살도의 새 도상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16세기 이전 제작된 삼장보살도 대부분은 일본 등 해외에 전해지고 있고 17~18세기 초 제작된 ‘안동 석탑사 삼장보살도’(1699)나 ‘대구 파계사 삼장보살도’(1707)조차 도난으로 소재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점에 비춰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는 18세기 전반 연대를 가진 삼장보살도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한 유려하면서도 세련된 필치와 안정된 구도, 적색과 녹색이 중심이 된 조화로운 색감에서 조선 후기 불화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1년 후에 조성된 ‘상주 남장사 삼장보살도’(1741)와 함께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삼장보살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김천 직지사 괘불도(金泉 直指寺 掛佛圖)’는 1803년 제작된 괘불로, 현재까지 알려진 19세기 괘불 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규모도 가장 크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형(菩薩形) 본존이 양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독존(獨尊) 형식 괘불도다. 괘불 하단에 쓰인 화기(畵記)를 통해 직지사를 중심으로 경북에서 활동한 제한을 비롯해 위전, 탄잠, 부첨, 신화 등 화승 13명이 제작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형 본존을 중심으로 화면 위에는 10위의 시방제불(十方諸佛)과 5위의 보살상을 배치한 간단한 구성이다. 앞 시기 괘불에서 보인 중량감 넘치는 형태에서 가늘고 날씬한 형상으로 변모한 점, 섬세하고 유려한 형태미의 구사보다는 굵고 대담한 선묘(線描)가 돋보여 시대적 전환기에 제작된 불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약간 어두운 적색과 녹색의 대비로 18세기보다는 시각적으로 다소 엄숙한 느낌을 주며, 일부 권속에 국한되어 쓰이던 입체적 음영법이 본존까지 확대되는 등 시대에 따라 달라진 표현기법도 확인된다.

높이 12m가 넘는 대형 불화여도 도상의 배치, 상·하축의 조형성, 입체감 있는 표현 등 여러 면에서 19세기 불화를 대표할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있다.

‘도은선생시집 권1~2(陶隱先生詩集 卷一~二)’는 고려 말 문인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의 문집 5권 가운데 권1~2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1406년 태종은 이숭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 후 그의 문집을 간행하라고 명했다. 변계량(1369∼1430)이 편집하고 권근(1352∼1409)이 서문을 지어 간행한 것이 ‘도은선생시집’이다.

권근이 서문을 쓴 연도가 1406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 개국 이래 최초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주조된 1403년에서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인쇄된 것으로 보인다. 계미자본 인출 시 주로 주석의 글자로 사용된 계미자 중자(中字)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책의 맨 앞은 없어져 권근이 쓴 서문의 말미 4행만 남아있다. 본문도 주석 없이 원문만 있는 권1~2만 수록되어 있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현존본이 귀중한 사례라는 점, 조선 개국 이래 가장 먼저 인쇄된 계미자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고려와 조선 전환기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한 자료다.

문화재청은 국보로 승격 예고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와 보물로 지정 예고한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 등 총 4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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