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
비싼 임대료에 밀려 혜화동 이전, 65년 전통 동양서림 2층에 새둥지
“서점 오픈합니다!”
15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동양서림’ 앞 인도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낙엽을 쓸던 유희경 시인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동양서림 가운데 난 나선형 계단을 밟았다.
다락방에 오르는 기분으로 2층에 들어서면 아담하게 꾸민 39.6m²(약 12평) 공간이 나타난다. 두 개 벽면에 늘어선 책꽂이에는 시집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시를 읽거나 대화할 수 있도록 기다란 나무 책상과 의자 8개가 놓여 있다. ‘신촌 시대’를 마감하고 이날 ‘혜화 시대’를 시작한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다.
“서점 안에 또 다른 서점이 있다”는 얘기에 사람들이 하나둘 2층으로 연결되는 동양서림 안쪽 나선형 계단을 기웃거렸다. 서점 주인인 유 시인은 신이 나서 방문한 이들에게 떡과 귤을 건넸다. 이날 ‘위트…’의 1호 손님인 신영선 씨(41)는 “시를 읽는 사람과는 회사에서 오가는 말과 다른 종류와 밀도의 참신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며 “서점의 이사 소식에 서점과 대학원, 집 사이 이동 경로부터 파악했다”고 했다. 4년 전 산후우울증을 문학으로 극복했다는 신 씨는 1년 전부터 ‘위트…’의 단골이 됐다.
‘위트…’는 2016년 6월 경의선 신촌역 앞에 문을 열었다. 전례 없는 시도에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월평균 900권이 넘는 시집이 팔리며 시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문을 닫아야 했다. 서점과 자리를 공유하던 카페 파스텔이 월 400만 원이 넘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동양서림으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두 서점의 사정을 잘 아는 황인숙 시인이 다리를 놓았다. 동양서림은 부산 피란길에서 돌아온 장욱진 화가의 부인 이순경 씨가 1953년 문을 열었다. 1987년부터는 이 씨와 함께 서점을 운영해 온 최주보 씨가 명맥을 이어왔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됐지만 한산했다. 아버지 최 씨로부터 서점을 넘겨받은 소영 씨는 “사람들로 북적댔으면 좋겠다. 그 전에는 혜화동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아 힘들었다”며 웃었다.
숱한 어려움에도 꿋꿋이 살길을 찾고,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에게서 응원을 받는 두 서점은 왠지 문학의 운명을 닮았다. 나오는 길에 돌아보니 흰 바탕에 녹색 글자로 된 동양서림의 오래된 간판 아래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점 동양서림과 위트앤시니컬이 함께 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점을 꿈꾼다’는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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