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말랑말랑한 존재… 프레임에 현혹되면 안돼”

  • 동아일보

‘유럽인 이야기’ 완간한 주경철 교수
역사는 긴 시간 성찰하는 학문… SNS로 사람들 사고 호흡 짧아져
역사의 매력은 과학과 문학의 결합

주경철 교수는 “개인적 흥미로 남긴 글도 시간이 지나면 귀한 사료가 된다. 19세기 영국 이발사가 남긴 피임법 기록에서 당시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주경철 교수는 “개인적 흥미로 남긴 글도 시간이 지나면 귀한 사료가 된다. 19세기 영국 이발사가 남긴 피임법 기록에서 당시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생전 처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글을 연재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댓글 읽지 말라’고 조언하더라. 하지만 가끔 훑어봤다. 불쾌한 댓글은 기억에 남기지 않으려 애써야 했지만, 세계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기대보다 훨씬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57)가 최근 3권으로 완간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휴머니스트) 시리즈는 지난해부터 한 포털에 연재한 글을 다듬어 모은 책이다. 16∼18세기 유럽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세기별로 8명씩 선정해 기술했다. 잔 다르크, 로베스피에르 등에 대한 숨은 사료와 아울러 마녀사냥이나 해적시대에 얽힌 이야기도 다뤘다.

“분야나 지역별로 글감을 안배하다 보니 빠진 인물이 많다. 음악인 중에서 베토벤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택한 건 역사의 흐름과 더 극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천재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성취한 독보적인 사회적 지위 한 발 앞에서 좌절했다. 본인에게는 비극이었지만 그로 인해 역사가와 독자에게는 보다 흥미로운 대상이 됐다.”

주 교수에게 이번 책은 예상 독자층을 배려한 글쓰기 작업의 첫 체험이기도 했다. 모바일과 인터넷을 통해 글을 읽는 젊은 독자의 눈길을 붙들기 위해 고문도구, 성(性) 풍속 등 흥미를 끌 만한 소재를 부지런히 찾아 집어넣었다. 그는 “긴 호흡으로 읽고 생각해야 하는 대상을 포털 사이트라는 매체에 담는 작업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의 읽기 쓰기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의 사고 호흡이 너무 짧아졌다. 역사는 어떤 사실의 조각 하나에서 재미를 찾는 영역이 아니다. 긴 시간의 흐름을 두루 살피는 성찰의 훈련에 요긴한 도구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근대사 전문가인 주 교수는 “과학과 문학의 성격을 겸비한 것이 역사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제한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엮어내는 탐정처럼, 역사가는 늘 엄밀하면서도 자료에만 매달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 군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단정적 설명의 재료로 역사를 활용한다면 그는 역사학의 본질적 역할을 거스르는 거다. 어떤 프레임에 현혹돼 역사를 들여다봐서는 곤란하다. 역사는 늘 말랑말랑하다. 오늘 내가 보낸 이메일이 100년 뒤 지금을 살필 중요한 사료가 된다. 자아와 세계의 현상을 파악하려는 끊임없는 성찰의 장(場)이 역사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주경철 교수#유럽인 이야기#역사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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