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언제?/프리모 레비 지음·이현경 옮김/539쪽·1만7000원·돌베개
◇릴리트/프리모 레비 지음·한리나 옮김/347쪽·1만3000원·돌베개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프리모 레비. 그의 마지막 소설인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1943∼45년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맞서 유격전을 벌이며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그렸다. 돌베개 제공
“그들은 지쳐 있었고 가난하고 더러웠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다. 상인, 재봉사, 랍비와 성가대 선창자의 자식들이었으며 독일군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이라면 보통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연기를 떠올리지만 ‘지금이 아니면…’은 독일군과 싸웠던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빨치산 투쟁을 그린 소설이다.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 거악과 맞서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담겼다.
책에서는 마치 유격대원들과 함께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이 느껴진다. 대원들의 고뇌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 ‘멘델’은 독일군에게 아내를 잃고 참상을 겪은 뒤 유대인의 신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날 이후 난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쁜 일이지만 독일군은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내가 독일인을 한 명 죽여야만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른 독일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어.”
반면 또 다른 낙오병 레오니드는 말한다. “차라리 독일인들 공장에 일하러 갈 거라고.…더 이상은 총을 쏘지 않을 거야.…당신도 나하고 똑같은 거 원하잖아. 집, 침대, 의미 있는 삶, 가족, 당신 고향 같은 마을.”
유격대 안에서도 유대인은 처지가 달랐다. 러시아인은 전쟁에서 이기면 돌아갈 집이 있었지만 유대인은 대학살로 마을이 사라지거나 잿더미가 돼 돌아갈 곳이 없었다. 멘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격대 합류를 거절당하기도 한다.
대원들의 인간적인 한계도 가감 없이 묘사된다. 유격대장 울리빈은 작은 성공에 도취돼 대원을 잃거나 경험이 없는 대원에게 지뢰를 옮기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린다. 열일곱 살 난 대원이 집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자 총살하기도 한다. 우리 빨치산 문학이 유격대를 다소 이상화하거나 영웅적인 모습 위주로 그린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의 작품이 분단 상황에서 억눌렸던 역사 속 패배자들의 기억을 되살린 것인 데 비해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이겼다는 차이도 아마 한 이유일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저자(1919∼1987)는 실제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가 살아남았고,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그린 작품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현대 증언 문학의 대표적 작가다. ‘지금이 아니면…’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982년 발표했다. 영역본을 저본으로 중역한 것이 한국에도 출간됐었지만 이번 번역본은 이탈리아어 원본을 저본으로 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난 인간의 여러 면모를 군더더기 없고 힘 있는 문장으로 깊이 파고든 걸작이다. 등장인물은 오늘날 주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다.
함께 발간된 ‘릴리트’는 저자의 아주 짧은 단편소설 36편이 담겼다. 표제작은 구전 유대신화 속 인물로 하와 이전에 창조된 인류 최초의 여성이지만 신의 저주로 끝없이 변신하며 사는 악마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집에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다룬 작품뿐 아니라 환상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 미래 세계에 관한 소설들이 묶였다. 인간 본성의 양면성에 관한 통찰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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