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서울!/박한규]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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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보통 낮 12시 15분경. 이제 꿀맛 같은 산책을 한다. 김천에서 사계절을 두 번 보냈지만 오감으로 봄을 만끽하면서 걷는 이맘때가 가장 좋다.

김천혁신도시는 아파트 단지들을 자유롭게 관통하면서 차도와 마주치지 않고 수 km를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연에 가까운 외곽 길을 택한다. 옥산마을을 끼고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직원들과 야간산행을 즐기는데 운남산 아래를 따라 모산마을로 이어지는 3km 남짓한 산책길은 김천 직장생활 최고의 선물이다.

봄은 참 더디게 온다. 기다림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절함이 가득하면 남들보다 빨리 봄을 볼 수 있다. 2월 초·중순이면 나뭇가지 끝 색깔이 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생기라고는 찾을 길이 없어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나무가 조금씩 붉은색을 띠면서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고 속삭인다. 물이 오르기 시작한 거다. 생김새와 빛깔은 비슷하지만, 벚꽃만큼 화려하지 않아 애틋한 매화가 얼굴을 내밀면 나무들은 겨울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잎의 호위도 없이 등장하는 진달래, 벚꽃, 개나리를 보면 봄이 얼마나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지 알 수 있다. 이 길에는 과수원이 많아 자두, 복숭아, 배 그리고 사과 꽃들로 꽃 대궐이 완성되면 봄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코로 확인하는 봄은 의당 꽃향기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매화 향. 뜻밖에 매화 향을 아는 이가 드문데, 매화 향은 같은 사군자 중 하나인 난 향기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무겁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은은하고 달콤한 매화 향을 맡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런 향도 있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산책길에 단 하나 있는 매실밭을 지나다 향에 취해 멈추고 섰노라면 어디선가 낮고 불규칙한 기계음 비슷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겨우내 굶주렸던 벌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면서 봄이 왔다고 내지르는 환호성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봄은 미각에서 완성된다. 쑥, 달래, 냉이로 시작하는 것은 어느 곳과 다를 바 없지만, 겨우내 명맥만 유지하던 오일장을 깨우는 것은 풍성한 봄나물과 새순들이다. 야생 고사리, 미나리, 돌나물, 머위와 두릅, 참죽, 엄나무, 옻, 가시오갈피 순까지 먹을거리들이 장바닥에 넘쳐난다.

온갖 꽃 내음, 농염한 도홧(桃花)빛, 애절한 새들의 연가(戀歌)에 빠져들면 향긋한 봄나물에 텁텁한 ‘탁배기’ 한잔을 들이키고 싶은 일탈의 유혹이 산책길의 유일한 부담이라면 부담이다.
 
―박한규

※필자(55)는 서울에서 공무원, 외국 회사 임원으로 일하다 경북 김천으로 가 대한법률구조공단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천혁신도시#봄#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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