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 블라우스와 회색 카디건 차림에 영문판 채식주의자 책을 든 데버러 스미스 씨는 “부와 명예보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번역가가 됐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e메일을 포함해 연락이 엄청 많이 왔어요. 며칠 동안 시끌벅적했죠. 딱 거기까지였어요. 달라진 건 없어요. 똑같이 집에서 책을 읽고 번역하고 있답니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한강 작가와 함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데버러 스미스 씨(29)는 1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차분하게 영어로 말을 이어갔다. 한국문학번역원 초청으로 이날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여한 그는 “내 번역이 인정받은 건 기쁘지만 행운도 함께했다. 맨부커상은 작가와 번역가뿐 아니라 편집자, 에이전시의 공동 작업이 이룬 성과”라고 강조했다.
“‘채식주의자’를 읽자마자 강렬한 이미지와 시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혔어요. 3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연작 소설 형식도 영국에는 없는 개념이라 더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어요.”
‘채식주의자’에 일부 오역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익숙한 표현이 늘어나면 오역의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답했다.
“완벽함은 번역가들이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원작의 핵심적인 의미에 충실하려 노력했습니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소주’, ‘만화’를 편집자는 ‘코리안 보드카’ ‘코리안 망가’로 표현하자고 했지만 한국어 발음 그대로 썼다. ‘채식주의자’ 이후 번역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형’ ‘언니’를 그대로 옮겼다.
“일본의 ‘스시’, ‘센세이(선생)’ 등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써도 세계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한국의 단어 역시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나라 어휘를 이용해 번역하지 않았어요.”
그는 ‘김보라’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한국인의 높은 관심에 대해서는 당황스러워했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독자가 즐기면 그 자체가 작가에게 보상이 되는 것 아닌가요? 상은 상일 뿐이에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만큼 번역이 아니라 직접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번역가는 인물, 이야기, 배경을 구상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에요(웃음). 작가는 글을 쓰다 막히는 경우가 많지만 번역가는 10시간 일하면 어느 정도 분량의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예측 가능한 게 좋아요.”
그는 단기간에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할 줄 아는 외국어가 한국어뿐이라 외국어 습득 능력이 뛰어난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작품을 더 빨리, 더 많이 읽고 싶다는 강렬한 동기가 있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그는 지난해 설립한 출판사 ‘틸티드 액시스’를 통해 아시아의 현대 작가 작품을 주로 번역해 출간할 예정이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기를 기다리는 영국 독자들이 많아요. 다른 한국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답니다. 배수아 작가의 작품이 올해 10월, 내년에 차례로 나와요. 한유주 작가의 글도 내년에 출간하고요. 1년에 최소 한 권 이상 한국 작가의 책을 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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