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나의 한국어 선생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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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어 선생님 ―황인찬(1988∼ )

나는 한국말 잘 모릅니다 나는 쉬운 말 필요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 인분의 어둠이 따라붙습니까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는 말했습니다

이 인분의 어둠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너는 문장을 완성시켜 말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나는 작문 연습합니다

― 나는 많은 말 필요합니다.
― 나는 김치 불고기 좋습니다.
― 나는 한국말 어렵습니다.

너는 붉은 색연필로 ○× 표시합니다 ×표시 투성이입니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너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너는 이제 끝이다 당장 사라져라 이것은 너가 한 말들입니다

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는 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마에 난 ×표시가 가렵기만 합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이 인분의 어둠과 함께 걸어갑니다 이 인분의 어둠이 말없이 걷습니다


외국어 교습 상황을 빌려 사랑의 괴로움을 말한 걸로 시를 읽어볼까. 외국말 배우기가 어렵듯 사랑의 ‘문법’도 익히기 까다로우니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히,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더듬지 말고 정확히 말하라고, 오히려 화자를 타박한다.

사랑에 빠진 그 역시, 가르쳐대고 화만 내는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말해도 소통이 안 된다. 그래서 자꾸 더듬거린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므로 ‘나’는 너와 함께 ‘사랑하는 두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도무지 어려운 것이다. 사랑의 불응과 불통과 호통 앞에선 누구나 주눅이 들어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무수히 ‘×표시’를 받으며 만들어낸 저 어색한 한국어 문장들은 결국, ‘사랑해요’라는 뜻이다. 안 되는 사랑을 마음에 가져버린 상태를 ‘이 인분의 어둠’이라 요약하는 이 시는, 재미있지만 아프다. ‘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이,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유구한 의문을 예리하게 바꿔 쓴 문장이어서이다. 그래서 일견 까다로워 보이지만, 좋은 시가 대개 그러하듯, 이 시도 읽고 나면 숙연해진다.

이영광 시인
#나의 한국어 선생님#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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