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아내의 낡은 치마에 한 글자 한 글자…‘하피첩’에 얽힌 사연

김상운 기자 입력 2015-10-13 17:11수정 2015-10-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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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할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이를 잘라 조그만 첩(帖)을 만들고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들에게 준다. 훗날 이 글을 보고 부모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운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1810년 7월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쓴 ‘하피첩(霞帔帖)’의 한 구절이다. 책 이름은 궁중에서 여인들이 입던 법복(法服) 하피를 따서 하피첩이라고 지었다.

그 해는 다산이 경기 남양주시 본가에서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오랜 세월 다산과 그의 가족은 서로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다산의 부인 홍 씨는 그에게 시집을 가면서 입었던 붉은 치마(紅裙·홍군)를 인편을 통해 보냈다. 부부의 젊은 날,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남편에 대한 애틋한 정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산은 부인의 뜻을 헤아려 치마를 서책 크기로 자른 뒤 그 위에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글을 남겼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달 고미술 경매시장에서 7억5000만 원에 사들인 다산의 ‘하피첩’을 13일 공개했다. 2005년 폐품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하피첩은 부산저축은행 부도로 경매시장에 올라왔다. 두 아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를 당부하는 내용의 이 하피첩은 서로 비슷한 내용을 담은 총 4권의 서책이다. 박물관은 이 중 경매시장에 나온 3권을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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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살펴본 하피첩은 여인의 치마를 사용한 책답게 비단에 바느질을 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두 아들과 손자를 위해 총 4권의 서책을 쓰다보니 치맛감으로 모두 감당할 수가 없어 책 중간에 종이도 들어있었다. 구름무늬에 박쥐를 그린 푸른색 표지의 한 권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표지와 내지를 합쳐 총 4쪽에 걸쳐 당시 고급 종이로 통한 푸른색의 중국산 시전지(詩箋紙)를 특별히 사용했다.

다산은 귀양살이 가운데 어렵게 구한 시전지에는 누구를 위해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 이문현 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도움을 받아 본문 일부를 옮겨본다. ‘마현(馬峴·현 경기 남양주시·다산 본가)은 논밭이 귀하기는 해도 살기가 좋은 땅이니라. 이 땅은 집안을 일으키기에 족한 땅이니 태만하고 사치를 부리지 않으면 집안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부디 예부터 내려온 이 터를 잘 지켜라.’

자신과 아들을 이어 본가를 물려받을 손자에게 특별히 남긴 말이다. 시전지에 적힌 글들은 다른 두 권과 달리 오직 이 책에만 적혀 있다. ‘내리사랑’이 따로 없다.

민속박물관은 4개월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하피첩을 내년 2월쯤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다.

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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