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형제, 하나의 氣로 이어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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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옛날에 왕계(王季)가 도적에게 잡혀 죽게 되었다. 형 왕림(王琳)이 스스로 결박하고 도적에게 나아가 아우보다 먼저 죽겠다고 하자, 도적이 불쌍히 여겨 놓아 주었다. 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도적들이 조례(趙禮)를 잡아 장차 삶아 먹으려고 하였는데, 형인 조효(趙孝)가 스스로 결박하고 도적에게 나아가 아우 대신 자기를 삶으라고 하자 도적이 의롭게 여겨 모두 놓아 주었다.

형제는 하나의 기(氣)로 이어진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형제간에 우애가 좋다 해도 저런 위기의 순간에 아우를 위해 선뜻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형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조선시대 학자 한몽린(韓夢麟) 선생도 ‘봉암집(鳳巖集)’에서 중국의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지금은 이런 행실을 볼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대홍수가 났는데 무산(茂山) 지역이 유독 심하여 떠내려간 집이 수백 채나 되고 물에 빠져 죽은 이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허생(許生)의 집도 물가에 있었는데 거센 물결이 넘실거려 건너오지도 못하고 온 가족이 다 빠져 죽게 되었다. 이때 그 아우 허혜(許蕙)는 건너편 언덕 높은 곳에 있으면서 형의 집이 점점 잠겨 위급해진 것을 보았지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아우는 형과 함께 죽겠다며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건너갔다. 마침내 무사히 건너가서 형제는 서로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형이 말하였다. “나야 불행하여 이런 난리를 겪는다지만 너는 높은 곳에 있으면서 왜 나와 함께 빠져 죽으려 든단 말이냐? 물이 빠진 뒤 시체나 찾아서 장사를 지내 주면 되지.” 아우가 울며 답하였다. “형님이 죽는 걸 보고 아우 혼자 차마 어떻게 살겠습니까? 함께 물에 빠져 지하에서 노니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떠내려 오던 나무 덤불이 쌓여 상류를 막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미친 듯이 흐르던 물길이 방향을 바꾸었고, 마침내 온 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모두 죽게 된 위기상황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선생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지극한 우애라, 그 정성이 신령을 감동시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豈非友愛出天, 至誠感神而然耶)?”입니다. 형제간의 끈끈한 사랑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핵가족화로 형제 관계도 거의 없어진 오늘날, 이런 사랑은 더욱더 그리울 수밖에 없습니다.

허씨 형제의 행동은 왕림이나 조효의 이야기와 맞먹을 만하다고 하면서도 한몽린 선생은 여기에 한 말씀 더 보탭니다. “왕림과 조효는 그래도 지각이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지만 허씨 형제는 지각이 없는 강물을 감동시켰으니 굳이 따지자면 허씨 형제가 좀 낫지 않겠는가?”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형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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